“김훈, 김별아, 전경린, 신경숙, 김탁환, 김경욱 등의 역사소설을 보면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없습니다. 역사를 무대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던 홍명희, 조정래 등과 달리 이들에게 과거는 철저히 상상과 허구의 공간일 뿐입니다. 재현보다는 환상을 즐기는 인터넷 세대의 문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디지털시대 문학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대한 연구로 주목받는 최혜실(45) 경희대 교수가 최근의 역사소설 붐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놨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매체의 문화적 속성이 작가의 문학관에 근본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24일 고려대에서 열리는 국제비교한국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그가 지난달 출간한 연구서 <문자문학에서 전자문화로> (한길사 발행)에서 김종광, 박민규씨 소설의 구술성과 황당한 상상력 등을 지적하며 인터넷 글쓰기 형식이 본격 문학에 틈입했다고 지적한 데서 한걸음 더 나간 셈이다. 문자문학에서>
최 교수는 김훈씨의 <현의 노래> 를 예로 들며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 이 소설은 박물관에서 옛 악기를 보며 품은 몽상에서 비롯한 것”이라며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가 현대의 대표적 시뮬라크르(현실 복제의 복제물)로 꼽은 것이 박물관”이라고 말했다. 현의>
박물관은 과거의 실재(實在)와 거리가 먼 현대적 복제물의 전시터인데, 여기에서 김씨의 소설이 출발했다는 것은 작가가 ‘현실의 재현’이란 근대적 문학관에서 자유로움을 의미한다는 분석이다.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 와 김애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 를 비롯한 요즘 성장소설에도 새로운 문화의 영향력이 감지된다고 최 교수는 말한다. 이들 작품 속 주인공은 매우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에 놓여있음에도, 현실에 맞서거나 좌절하는 대신 유연하게 대처하는 ‘쿨’한 모습을 보여준다. 달려라,> 오빠가>
최 교수는 “근대적 성장소설이 현실적 이상형을 상정하고 거기에 가닿고자 애쓰는 주체들을 그렸다면, 근래 작품엔 여러 상황에 맞춰 배우 같은 연기를 선보이는 ‘다중 주체’가 대세”라며 “이는 인터넷 세대가 지향하는 처세 방식을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이달 출간한 <문화산업과 스토리텔링> (다할미디어 발행)까지 1995년 이후 10여 권의 연구서를 내놓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매체가 문학을 바꾼다”고 단언한다. 인쇄 매체에서 디지털 매체 시대로 넘어오면서 스토리텔링 방식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고, 지식 소비뿐 아니라 생산에서도 민주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산업과>
그는 지금의 등단 제도가 심각한 도전을 받을 것이라 예견했다. 단편 위주로, 정형화된 형식의 작품을 통해 작가를 발굴하는 방식으로는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란 지적이다. “듀나, 전아리와 같은 작가는 인터넷에서 활동하다가 문단의 주목을 받은 경우”라며 “대중의 감상 수준이 높아져 대중문학의 수준이 본격 문학에 육박하는 추세고, 질 높은 장르문학도 활성화되고 있어 등단 제도의 독점력이 점차 떨어질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최 교수는 “올해 초 ‘한ㆍ중ㆍ일 3국 문화교류 현황’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분야에서 한국이 대등하거나 우세한 지위에 있었는데 유독 문학 부문만 일본문학의 잠식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한국문학의 문화적 경쟁력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는 “본격 문학 작가들도 인터넷 등의 신매체를 적극 활용하거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과 협업하는 등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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