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다음달 개봉)의 주인공인 노인 권순분(나문희 분)은 인터넷 미니홈피 사진첩을 척척 꾸미고 휴대폰은 물론 다기능 PDA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노인이지만 최신 기술에 밝은, ‘얼리 어답터(남보다 먼저 신제품을 접하는 소비자)’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 속 노인들은 편하게 살자고 만들어 놓은 인터넷과 휴대폰, 각종 자동화기기 등을 낯설고 불편하게 여기는 게 일반적이다.
전자 이기(利器) 사용 엄두 못 내
경기 부천시에 사는 이모(64ㆍ여)씨는 은행에 가면 무조건 번호표부터 뽑는다. 공과금을 내거나 현금을 찾는 단순 업무 때도 그렇다. 창구에 사람들이 몰리면 몇 십분이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씨는 “가끔 옆 사람에게 부탁해 현금인출기(ATM)에서 돈을 찾아달라고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엔 말끝을 흐렸다.
김양석(84)씨는 휴대폰을 지니고 다니지만 전화를 걸고 받는 일 외에 카메라폰 이용 등은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다. 전화 걸 때도 ‘첫째 아들은 1번, 둘째 아들은 2번’ 식으로 서열대로 매겨 놓은 단축번호 단추를 누르면 그만이다. 김씨 역시 은행은 창구를 이용하고, 버스 탈 땐 전자교통카드 대신 현금을 낸다.
이모(73)씨는 17일 서울역에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서울 아들집에 왔다가 부산의 친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왔는데 기차표를 파는 창구 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근처엔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신용카드로 결제해 승차권을 발급 받는 승차권 자동발매기가 여러 대 있었지만 사용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왜 좋은지 알려주고 가르쳐야
노인의 정보화 능력, 또는 정보통신기기 활용 능력은 젊은 세대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 따르면 전 국민 평균 종합정보화 수준을 100으로 따졌을 때, 50대 연령 이상의 정보화 수준은 59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종합 정보화 수준이란 인터넷ㆍ컴퓨터 등에 대한 활용 빈도, 다루는 능력, 접근성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수치화한 것이다. 진흥원이 파악하는 국내 정보취약 인원은 1,487만명 정도인데 이 중 절반인 723만명이 50세 이상이다. 65세 이상 연령의 90%는 아예 인터넷ㆍ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이것 하나만은 꼭 익혀두겠다’는 노인 스스로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어디서나 노인이 쉽게 정보활용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사회가 인프라를 갖춰 놓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송선영 성공회대 노인복지연구소 연구원은 “노인들은 전자기기에 대해 알고 싶어도 물어볼 곳이 마땅치 않아 체념하고 그냥 지내는 경향이 강하다”며 “자식 손주 세대와 떨어져 지내면서 이러한 ‘정보 세대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영재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나이가 들면 신(新)기술 앞에서 두렵고 낯설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동시에 구체적으로 필요한 능력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교육 인프라를 갖추는 게 사회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박원기 기자 one@hk.co.kr김도연(이화여대 경영학과 4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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