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발 신용경색 위기를 보면서 꼭 10년 전 우리나라의 경제위기와 비교하게 된다. 차이점은 많지만, 실물 부문의 부실이 은행의 불안을 일으키고 위기가 다시 금융시장 전반으로 확산된다는 점이 흡사하다.
실물 부문의 부실은 우리나라의 경우 수익성이 급격히 하락한 기업 부문이었고, 미국의 경우는 과열됐던 주택시장의 침체와 위험한 모기지 채권시장에 과다하게 자금을 쏟아 부은 투자회사들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금융위기가 극단화하면서 자금줄이 완전히 끊기고 국가가 부도상태에 빠지는 지경까지 갔다. 반면, 이번 위기는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으나, 미국의 극단적 경제위기 위험성에 대한 우려는 별로 없다.
지난 주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재할인율 인하가 뉴욕증시의 급반등으로 이어진 것도 사태에 대한 투자자들의 생각이 우리나라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 근본 차이는 '최종 대부자' 신뢰
오늘의 미국 경제가 당시 한국 경제보다 더 낫고 훌륭하기 때문일까. 사실 위기 이후 비판과 자기혐오의 홍수 속에서 기업의 무모한 설비투자, 은행의 불건전한 대출 관행, 기업과 정치권의 유착 등 한국경제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 영미권의 논자들은 '아시아적 가치'의 한계를 지적하며, 이런 구조적 문제가 경제위기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경제 역시 이런 식의 문제점이 없는 게 아니다. 한 해 수 조 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는 월스트리트의 수많은 헤지펀드는 자기자본의 10배가 넘는 신용 레버리지(지렛대)를 물쓰듯 쓰고 있다.
당시 한국 부실기업들의 부채비율이 1,000%가 넘었다고 법석을 떨었지만, 오늘날 미국의 첨단 금융기업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거시경제도 그렇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무국일 뿐만 아니라, 최대의 경상수지ㆍ재정적자국이다. 따라서 어느 경제에나 있기 마련인 구조적 문제가 극단적 경제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
금융불안이 우리나라에선 한 순간에 극단적 경제위기로 진화한 반면, 미국은 그럭저럭 연착륙(soft landing)을 점치게 되는 근본적 차이는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그 차이를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에 대한 시장의 믿음이라고 본다.
'최종 대부자'란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갚아야 할 자금을 정상적으로는 구하지 못하는 채무자들에게 최종적으로 긴급자금을 빌려줄 수 있는 주체를 말한다. 국가경제에서는 중앙은행이 보통 이 역할을 한다.
문제는 중앙은행까지 위험할 경우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으로서 천재지변이 없는 한 국채 발행을 통해 얼마든지 달러를 조달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유럽, 일본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도 있어 '최종 대부자'로서 거의 절대적 신뢰를 얻고 있다.
● 아시아 역내 협력체제 구축해야
반면, 경제위기 당시 우리나라에는 '최종 대부자'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전화를 빌미 삼아 일본마저 자금 지원을 거부하자, 끈 떨어진 연처럼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 대부자'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없다면 언제라도 금융위기를 다시 겪을 수밖에 없다. 1997년 경제위기를 전후해 일본 주도로 아시아통화기금(AMF) 구상이 추진됐다가 무산됐지만, IMF와 달리 아시아시장의 안정을 위해 각국의 이해에 부응할 수 있는 역내의 '최종 대부자' 구축이 시급하다.
새로운 아시아의 협력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가다듬을 때다.
뉴욕=장인철특파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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