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고 변함이 없어 존경한다. 아내를 보며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자서전 중에서’)
17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를 이끌었던 남편 곁으로 돌아간 변중석 여사는 한국 최고의 재벌 총수 안주인이라는 의식조차 없이‘재봉틀 한대, 장독대 하나’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범 현대가의 산증인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정 명예회장이 경부고속도로 최단기간 건설(1970년), 울산 현대조선소 건설(74년), 소양강 다목적 댐 건설(76년), 서산 간척사업 유조선 공법 도입(84년) 등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한국 경제사를 새로 쓸 수 있었던 것도 변 여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게 중론이다.
현대ㆍ기아차 관계자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정씨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5명의 시동생들과 8남 1녀의 자식 뒷바라지를 묵묵히 해온 변 여사의 내조가 없었다면, 정 명예회장이 역사에 남을 뛰어난 추진력과 창의적인 도전정신을 맘껏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명예회장은 3가지 이유로 고인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생전에 재봉틀 한대와 장독대의 항아리를 유일한 재산으로 아는 점, 부자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점, 평생 변함이 없는 점 등이다. 정 명예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젊은 시절 그렇게 어려웠던 고생을 함께 하면서도 불평불만 하나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꾸려준 내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21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난 변 여사는 아버지가 강원 통천군 송전면장이었다. 39년 12월 15세의 나이에 같은 마을에 사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많은 자식을 길러내며 그는 늘 검소하고 겸손했다. 또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남편의 내조와 자식교육에 전념해 ‘현모양처’의 표본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정 명예회장은 매일 새벽 5시에 온 식구들과 아침을 함께 하며 근면함과 검소함을 자식과 동생들에게 가르쳐 온 것으로 유명하다. 고인은 이를 위해 새벽 3시 반부터 일어나 아침준비를 하며 남편과 자식들을 뒷바라지했다.
고인은 남편이 사준 자동차를 집에 두고 도매시장에 나가 채소나 잡화를 사서 용달차에 싣고 돌아오곤 했다. 집에서는 언제나 통바지 차림이어서 손님이 오면 주인 아주머니를 따로 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인은 고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 고 정순영 성우그룹 회장,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정상영 KCC 명예회장 등 시동생들의 결혼 등도 손수 챙겼다. 며느리들에 대해서도 시골 아낙네 같은 넉넉함을 보였다. 대접 받으려 하지 않고 따뜻한 정으로 내리사랑을 실천했고 늘 행동가짐을 조심하고 겸손함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고인은 어머니로서 견디기 어려운 비운을 겪기도 했다. 장남인 몽필씨가 82년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등졌고, 90년에는 4남인 몽우씨가, 2003년 5남인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대북사업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생전에 3명의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셈이다.
몽헌씨가 자살했을 때 병석의 고인은 의식이 없는 상태여서 그의 사망을 몰라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오늘날 범 현대가를 일구는 주춧돌이 됐던 고인은 정 명예회장을 떠나 보낸 지 6년 반 만에 그의 곁에 영원히 잠들게 됐다.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그룹 고문 등이 고인의 임종을 지켜봤다.
박진용 기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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