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지만, 우리 사회는 종교적 억압이 심하죠. 도덕적, 윤리적 외양을 내세우면서 치부를 감추는데 급급합니다. 우리 사회의 번드르르한 겉모습 뒤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반이성적 작태 중 폭력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이 제 소설입니다.” 광적이고 파렴치한 폭력의 세계를 날것으로 묘사해 독자에게 불편한 충격을 주고 있는 소설가 백가흠(33)씨. 그가 두번째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 (창비 발행)를 냈다.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 이후 2년 만으로, 그동안 써온 단편 9편을 묶었다. 귀뚜라미가> 조대리의>
폭력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번 작품집에도 선연하다. 기형아를 유기하는 젊은 부부(‘웰컴, 베이비!’), 거둬준 노인을 상대로 위장 강도짓을 벌이는 부랑아들(‘매일 기다려’), 떠나려는 애인을 둘씩이나 감금하고 성폭행 동영상으로 협박하는 남자(‘굿바이 투 로맨스’) 등 교정불가의 ‘나쁜 놈’들이 득시글거린다.
변화도 감지된다. 작가가 그동안 잠재적 폭력성이나 뒤틀린 성의식을 가진 남성이 표출하는 폭력을 주로 다뤘다면, 이번 창작집에서는 노인, 아동 등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주목했다.
폭력의 근원에 대한 탐구가 개인적 성향에서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됐음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작가의 문학적 전략이기도 하다. 백씨는 “예전엔 서정적 문체를 동원해 폭력의 양상을 세밀하게 표현했는데, 인물 설정을 바꿈으로써 묘사에 기대지 않고도 극악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피해자에게도 온정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 중립적이고 냉정한 작가적 시선은 여전하다. ‘매일 기다려’의 노인이 아이들의 기식과 패악을 견뎌내는 힘은 가족을 꾸리고 싶은 욕망이다.
평생을 홀로 살아오다 정 붙일 상대를 만난 노인은 자기 재산을 강탈한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떠나는 모습에 “서운하고 아쉬워서 주책없이 흐르려는 눈물을 참고 또 참는다.”(127쪽) 백씨는 “노인은 모든 것을 다 뺏기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아이들보다 더 큰 것을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며 “동정의 시선은 필요치 않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화해는 없다. 표제작을 비롯한 몇몇 작품은 이전에 비해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열어둔 결론을 맺었지만, 독자가 출구없는 폭력의 세계를 목격하며 느끼는 답답함이 크게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 역시 “작품을 쓰며 늘 화해를 바라지만 결국 작중 인물들은 소통하지 못한 채 불화하고 파국을 맞는다”며 “가끔 내가 (정신적) 미숙아 같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온존하는 폭력을, 그저 자신의 평온을 확인하는 가십이나 위로로 삼는 우리가 어찌 백가흠 소설을 불편하고 답답할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는가. 원주 토지문학관에 기거하고 있는 백씨는 다음 작품으로 히피를 소재로 한 장편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백가흠씨는 “잔혹한 이미지의 김기덕 영화보다 아무 일 안 일어나는 데도 보고 있자면 견디기 힘든 홍상수 영화를 좋아한다”며 자신의 문학적 지향을 에둘러 표현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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