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합민주신당의 오충일 대표는 창당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용어로 보면 잡탕보다는 퓨전”이라고 말했다. 신당의 정체성을 두고 일어난 잡탕 논란에 대한 해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퓨전’에 대한 오해다. 퓨전은 원래 성질이 서로 다른 물질이 결합해 새로운 성질을 띨 때 쓰는 용어다. 예를 든다면 스파게티 같은 것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국수와 신대륙에서 가져온 토마토에 올리브유를 넣어 이탈리아인의 요리 감각으로 새로운 맛을 창출한 것이 스파게티다. 각 재료의 고유한 맛보다는 재료가 결합해 독특하고 새로운 맛을 낸다.
이에 비해 여러 가지 재료의 고유한 맛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면 퓨전이 아니라 크로스오버라고 해야 옳다. 크로스오버는 구성 물질들이 자신의 성질, 즉 고유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공존하는 결합을 의미한다. 잡탕이나 비빔밥이 그런 경우다.
■ 화학적 결합 어려운 민주신당
민주신당이 퓨전을 지향한다면 참여한 각 세력이 일정 부분 자신들의 주장이나 성향을 양보하거나 희생하고 화학적 결합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띤 정당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민주신당 참여 세력들의 면면과 중심세력의 리더십 등으로 미뤄 당분간 그런 결합은 일어날 것 같지가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민주신당은 “퓨전보다는 잡탕”이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국민들이 꼭 퓨전 음식만 선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도 퓨전보다는 잡탕이나 비빔밥 같은 크로스오버 쪽이다. 영국 노동당 정부의 제3의 길이 대표적인 크로스오버 노선이다.
연정이 일반화한 내각제 국가는 대부분 정당 간 크로스오버로 국정을 이끌어 간다. 심지어 독일의 기민당과 사민당처럼 정반대 성향의 정당들도 손을 잡고 내각을 구성한다. 요즘처럼 사회구성 집단의 요구가 다양하고 특정 정당의 단일 방법론만으로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에는 정치세력 간의 크로스오버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오 대표의 기자간담회에 동석했던 김상희 최고위원의 부연 설명은 보다 솔직해 보인다. 그는 “정당이 이념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지역구도 체제가 계속되는 한국 정치사에서 잡탕인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잡탕적 성격이지만 신당이 화합과 조화를 통해 새로운 맛을 내는 비빔밥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당의 구성 세력들이 과연 그의 기대처럼 화합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잡탕이나 비빔밥은 여러 가지 재료를 쓸어 넣지만 서로 친화적인 재료를 넣고 상극인 재료는 피해야 제 맛을 낸다. 재료들의 신선도도 중요하다.
그러나 신당참여 제 세력이 반한나라당이라는 큰 틀에서는 성질을 같이하지만 상극적인 요소가 적지 않고 신선도도 떨어진다. 출신이 다르다고 1~2%짜리가 5%짜리의 과거를 문제 삼는다. 구성원 간 최소한의 조화를 위한 친화성이 필요한데 서로 배척한다. 도토리에 대한 도토리의 투쟁 판이다.
대통합 비빔밥은 분명 구미가 당기는 메뉴다. 그러나 잡탕이나 비빔밥의 맛이 주방장의 솜씨에 달렸듯이 민주신당이 손님을 끌기 위해서는 뛰어난 주방장이 필요하다. 민주신당의 ‘대통합 식당’엔 아직 그런 솜씨를 가진 주방장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자기희생의 미덕이 있었던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 시대가 아니다.
오직 이익과 이익의 거래만 있다. 어떠한 대의명분도 나를 통하지 않으면, 내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거부하는 시대다. 지분 다툼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와 같은 따로따로 개체들을 엮어낼 리더십이 없다면 대통합의 식당의 미래는 없다.
■ 입맛 끌 ‘주방장 메뉴’ 있을는지
그나마 대통합 메뉴 ‘대(大)짜’를 내놓는다고 예고를 했다가 겨우 ‘중(中)짜’를 내놓아 손님들을 실망시켰다. 양과 질에서 손님을 감동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주방장의 덥수룩한 수염과 같은 것은 비빔밥 맛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민주신당의 주방장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오늘 점심에 인근 소문난 잡탕이나 비빔밥 집에 들러 주방을 기웃거려 보는 것은 어떨까. 거기에 비법이 있을지 모르니.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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