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미 하원 본회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킨 주인공은 미 의원들이 아니라 한인 동포들이었다. 한인 동포사회가 미 의원들을 움직인 것이다. 한인 동포들은 의원들을 직접 찾아 다니며 ‘발로 뛰는’ 지지 호소를 한 끝에 전체 435명의 하원의원 가운데 168명으로부터 결의안 공동 발의자 서명을 받아냈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고 대견스러운 성과였다.
■ 위안부결의안 이끌어낸 주역들
뉴욕의 동포들은 새벽 차로 4,5시간이 걸리는 워싱턴에 달려왔다가 다음 날의 생업 복귀를 위해 밤늦게 파김치가 돼 뉴욕으로 돌아가는 고단함을 마다하지 않았다. 워싱턴 동포들과 함께 미 하원의원들을 한 명이라도 더 만나보려는 목적에서 이뤄진 뉴욕 동포들의 ‘당일치기 원정 로비’는 11차례나 이어졌다.
수백만 달러의 로비 자금을 쏟아 부으며 결의안 통과를 저지하려 했던 일본 정부를 굴복시킨 것은 푼푼이 모은 동포들의 성금이었다. 한인 동포들은 활동비를 지원해 달라고 한국 정부에 손을 벌리지도 않았고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에 실은 일본 역사왜곡 규탄 광고 비용도 스스로 마련했다. 끝까지 자발적 ‘풀뿌리 운동’의 순수성을 지켜낸 것이다.
이 운동을 통해 확인된 한인 동포사회의 잠재력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같을 것이다.
결의안 통과의 주역 중 주역으로 꼽히는 뉴욕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소장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정확히 착안하고 있었다. 그는 결의안 통과 직후 “한인들의 정치력 결집 가능성이 여실히 확인됐다”며 “특히 운동에 참여한 한인 2,3세대들이 큰 힘과 자신감을 얻은 게 더 없는 소득”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나아가 결의안 통과를 계기로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이기 위한 미국 내 전국적 유권자 조직 결성에 나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결의안 통과 운동 과정에서는 워싱턴, 뉴욕에 이어 로스앤젤레스 동포사회까지 힘을 합침으로써 전국 조직의 단초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결의안 통과 과정에서의 주미 한국대사관의 역할과 관련해서도 밝혀두고 싶은 대목이 있다. 한일 정부 간 대결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주미 대사관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다’고 보면 된다.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지난해 9월 당시 레인 에번스 의원이 발의한 유사한 결의안이 하원 국제관계위를 통과했으나 본회의에는 상정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된 적이 있다.
■ 주미대사관도 조용히 큰 역할
그 때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일본계 3세인 마이크 혼다 의원이 다시 결의안을 추진하도록 불씨를 옮겨 심는 데 주미 대사관은 숨은 역할을 했다. 이후 혼다 의원은 유력 언론들의 주목을 받는 미 하원에서의 ‘결의안 스타’가 됐다. 물질적 도움은 주지 못해도 머리는 빌려줄 수 있었기에 주미 대사관의 외교관들은 한인 동포들의 자문에도 충실히 응했다. 특히 김은석 공사참사관은 그 과정에서 한인 동포들과 서로에게 매우 고마워하는 사이가 됐다.
다른 동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굳이 주역들의 이름을 거론하자면 이문형ㆍ홍일송 워싱턴 범동포 대책위 공동위원장, 서옥자 워싱턴정신대대책위원장, 로스앤젤레스의 폴 윤 신부 등이 당연히 앞 자리에 와야 할 것이다. 옥스포드대에서 공부한 재원으로 실무를 맡아준 애너벨 박, 존스 홉킨스대에서 연수를 하던 중 이 운동에 뛰어든 정치인 허인회씨 등의 헌신을 보는 것도 흐뭇한 일이었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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