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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10>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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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10>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입력
2007.07.3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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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칼럼니스트 고종석씨가 쓴 책의 이름이다. 여기서 ‘그리스인’이라는 말은 인종이나 국적에 관계없는 개인으로서 세계시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요즘 한국인은 좀 다른 의미에서 그리스인이 되어가는 듯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삶을 미학적으로 조직했다. 그들이 삶의 이상으로 삼았던 ‘칼로카가티아’란 그저 육체의 아름다움(kalon=美)만이 아니라, 거기에 정신의 윤리(agathon=德)가 결합된 상태를 의미했다.

그리스인들의 ‘덕’은 오늘날처럼 ‘착함’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수함’을 가리켰다. 말하자면 끝없이 자신을 초극하여 보통 사람의 그것을 능가하는 능력이나 수완을 보여주는 사람을 가리켜, 그들은 ‘덕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스 르네상스가 일어나려나? 우연히 ‘예술의 전당’ 근처를 거닐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눈에 띄는 병원들이 모두 성형외과였던 것이다. 딱 하나 예외가 있긴 했는데, 예외가 된 그 병원은 다이어트 병원이었다.

병원의 간판마다 ‘aesthetic’이라고 씌어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미용’을 의미하는 그 낱말은 동시에 ‘미학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게다가 ‘성형’을 의미하는 ‘plastic’이라는 낱말 역시 동시에 ‘조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낱말들의 의미간섭이 묘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고대에 조각가들의 일을 오늘날은 의사들이 넘겨받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고대인이 대리석을 재료로 삼았다면, 현대인은 거기에 생체를 사용하는 것뿐이랄까?

고대의 조각가 피디아스는 신상을 만들 때 여러 명의 모델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부위만을 취했다고 한다. 성형외과 의사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어느 기자가 강남의 성형외과 전문의들에게 물어 이런 대답을 얻어냈다.

“역시 눈은 김태희. 코는 송혜교 vs 한가인. 누가 한채영의 가슴을 당해. 노래하지 않아도 입술은 엄정화. 얼굴 윤곽의 강자 한예슬. 내가 진짜 S라인 김아중 전지현.”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신체를 더 아름다울 수 없는 극한까지 끌어올려, 거기서 그것을 신의 몸으로 만들어버렸다. 현대의 여성들 역시 가능하면 제 몸을 아름다움의 극한으로 끌어올려 대중문화의 여신이 되려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한 마디로 문명의 패러다임이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 바뀌어 가면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문자로 표현되는 지성이 아니라, 영상으로 드러나는 외모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원리가 어느새 도덕에서 미학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점. 한편으로는 ‘예쁘면 모든 게 모든 게 용서’되고, 한편으로는 ‘못 생겨서 죄송’한 게 요즘의 분위기다.

마초이즘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의 남성들은 야할 권리마저 앗아가는 ‘도덕적 마초’였다. 그 희생자 마광수 교수는 마초이즘의 아방가르드다. 그에 이르러 마초이즘은 ‘미학적’ 단계로 발전했다.

‘예쁜 여학생들이 더 부지런하다’고 믿는 그는 성형을 하지 않는 여성들을 가리켜 ‘게으르다’고 말했다. 지금은 도발적으로 들리지만,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머잖아 그의 태도는 모든 남성의 것이 될 게다.

과거에는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했으나, 오늘날 부모가 주신 신체에 칼을 대는 것은 더 이상 ‘부도덕’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미학적 마초는 여성의 신체를 칼로 깎아 제 눈에 쏙 들어오게 만들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아직은 과도기라, 여성에게 참될 것을 요구하는 도덕적 코드가 남아 있다. “성형수술을 받는 게 굳이 죄가 되는 것은 없다. 진짜 문제는 수술로 만든 미모를 마치 자연미인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전히 중세스러운 데가 있다. 남성들은 종교재판관이 되어 이단 색출하듯이 성형 연예인을 심문한다. 연예인들은 줄줄이 성형 사실을 고백한다. 이 거룩한 고해성사를 통해 성형의 죄는 용서된다.

용서 받지 못할 것은 성형을 하고도 자연미인 척하는 것. 신체에 칼을 대는 것은 문제가 안 되어도, 남성의 눈을 속이는 죄만큼은 아직도 용서가 안 된다. 여기에는 도덕적 코드와 미학적 코드가 혼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과도기가 지나면 고백의 도덕적 의무는 사라질 것이다. 그 때쯤이면 여성의 성형을 순수한 미학적 관점에서 평가하게 될 것이고, 그 평가는 아마도 예술평론과 비슷한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가령 ‘아름다움에는 일탈이 있어야 한다. 너무 질서 잡힌 얼굴은 외려 아름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강혜정의 컨셉트는 실패다. 그의 얼굴에 일탈의 매력을 주었던 입의 튀어나옴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라고 욕망이 없겠는가? 그들 역시 남성에게 ‘덕(agathon)’을 요구한다. 그리스적 의미의 덕은 ‘착함’이 아니라 ‘우수함’이다. 우리의 자본주의적 맥락에서 그 우수함은 아마도 평균치를 넘어서는 학력과 재력을 의미할 게다.

“난 카드 주는 남자가 좋아요.” 아티스트 낸시 랭의 발언에는 어딘지 통쾌한 구석이 있다. 여자 외모 밝히면서 정작 여자에게 줄 거라곤 교통 카드 밖에 없는 마초들을 일거에 주눅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외모 차별에는 재력 차별로. 달콤한 복수라고 해야 하나? 남성들이 설정한 드높은 미학적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여성들의 열패감은, 여성들이 원하는 드높은 경제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남성들의 열등감으로 상쇄된다.

‘참됨’이나 ‘착함’의 초월적 가치가 떠난 자리에 ‘외모’와 ‘재력’의 세속적 가치가 자리를 잡았다. 자본주의적 속물의 칼로카가티아라고 할까? 어쨌든 사람들은 이미 도덕적 코드가 아니라 미학적 코드로 삶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미학적이든 경제적이든 ‘우수함’ 자체를 덕으로 삼는 이 새로운 유미주의에는 어딘지 파시즘적인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든, 마음에 들지 않던 간에, 우리 모두는 이미 그리스인이다.

■ 오를랑의 '성형 퍼포먼스'/"여성의 美는 남성들에 의해 구축된다"

"신체 예술은 고전적 의미에서 자기 초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통해 실현된다." 프랑스의 작가 오를랑의 <신체예술선언> 에 나오는 말이다. 한 마디로 현대의학의 테크놀로지로 고대적 신체의 이상미를 실현하겠다는 얘기.

여성 작가들의 신체예술은 페니미즘과 떼놓을 수 없다. 예로부터 여성의 신체가 남성적 시각의 식민지였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를 주제로 삼은 것 중에서 가장 과격한 것은 아마도 오를랑의 퍼포먼스일 게다.

<성 오를랑의 환생> 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에서 이 프랑스의 예술가는 자신의 몸에 실제로 칼을 댄다. 1990년부터 1993년에 걸쳐 아홉 차례에 걸쳐 진행된 수술을 통해 그녀는 제 몸을 고전예술작품에 등장하는 신체와 섞어 놓았다.

제 몸에 칼을 대는 이 과격한 자학적 퍼포먼스를 통해 이 신체예술의 성녀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 마디로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남성들의 쾌락을 위해 남성들에 의해 구축된다'는 것이다.

<성 오를랑> 의 환생에서 모델이 된 것은 고전적 회화와 조각 속의 비너스, 디아나, 프시케, 에우로파, 그리고 모나리자. 그녀는 제 몸이 칼집을 받는 수술대 위에 이 고전적 도상들의 사진을 늘어놓았다.

피디아스가 다섯 명의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부위를 따서 조각을 한 것처럼, 오를랑 역시 제 몸 안에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섯 여인의 신체를 통합시키려 한 것이다. 오를랑의 신체예술은 물론 고전적 이상미를 추구하기 위한 게 아니다.

<선언> 은 이렇게 이어진다. "신체는 수정된 레디메이드가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고전적 이상으로 볼 수 없다." 한 마디로, 자신의 신체예술은 유명한 도상을 차용해 베끼는 '키치'에 불과하다는 것. 오늘날 대중들이 즐겨 하는 미용성형 역시 실은 키치, 즉 도처에 널린 스타의 이미지를 베끼는 '레디메이드'에 불과하다.

성형수술은 외과적 수술을 이용한 팝 아트에 가깝다. 워홀의 그림 속에서 마릴린 먼로가 수십 번, 수 백 번 반복되듯이, 거리에서 스타의 얼굴은 외과적 복제를 통해 수 없이 반복된다.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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