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지방 출장이 잦은 직장인 원모(40)씨는 최근 고속도로 통행카드 구입을 위해 기업은행 지점을 찾았다. 10만원 짜리 통행카드를 사기 위해 신용카드를 제시하자 창구 직원은 "카드 결제는 안 된다"고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는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한데 왜 안 되느냐는 질문에 "카드 결제 단말기가 설치돼 있지 않고 은행은 단지 판매 대행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답이었다. 한참 실랑이 끝에 원씨는 "그럼 현금영수증이라도 끊어 달라"고 했지만, 역시 "안 된다"는 답변 뿐이었다.
원씨는 "동네 구멍가게도 신용카드를 받는 세상에 정작 카드의 주인인 은행이 카드 결제를 거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신용카드 영업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은행들이 정작 신용카드 결제를 외면해 눈총을 받고 있다. 고객들에게는 자행 카드 발급을 적극 권유하면서도, 자신들은 현금 결제만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26일 금융계에 따르면 은행들이 부업으로 창구에서 금 실물이나 기프트카드, 고속도로 통행카드, 상품권, 스포츠경기 입장권 등 다양한 비금융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신용카드 결제는 하지 않고 오직 '현금 장사'만 한다. 그러면서 현금영수증도 발급해 주지 않는다.
신한은행은 최근 금 투자가 각광을 받으면서 창구에서 판매중인 '골드 바'가 톡톡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월 평균 금 판매량은 100~120㎏ 수준. 한달 매출이 25억원 안팎에 달하는 '대형 귀금속 상가'인 셈이다. 하지만 다른 소형 귀금속 상가와 달리 결제는 무조건 현금만 가능하다.
골드 바 현금 거래는 부자들이 증여세를 내지 않고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거나, 뇌물 등으로 이용될 수 있어 은행이 불법을 방조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축구국가대표 공식 후원사인 하나은행 역시 국내에서 열리는 축구국가대표 대항전(A매치) 입장권을 창구 판매하고 있지만 역시 현금만 받는다.
백화점 상품권이나, 일정 금액 내에서 무기명으로 사용이 가능한 기프트카드도 마찬가지다. 신한, 우리, 하나, 기업 등 대부분 은행들이 부수적인 수익 사업으로 창구 판매를 하고 있지만 신용카드 결제를 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통상 법인카드로는 상품권 구매가 가능한데 은행 창구에서는 자행 카드에 한해서만 카드 구매를 허용하고 있다.
은행들의 해명은 군색하다. 한 은행 관계자는 "판매 시 은행이 얻을 수 있는 마진이 적기 때문에 타사 카드 가맹점에 가입할 경우 가맹점 수수료 등의 비용이 커서 적정 마진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피해는 고객들에게 전가된다. 정작 신용카드를 발급해주는 은행이 카드 결제를 외면하고, 현금 영수증도 발급해주지 않아 연말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현금 결제에 따른 불편함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한 고객은 "카드 사용 장려책을 내놓으면서 공공요금 등을 카드로 수납하지 않는 정부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며 "더구나 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에 난색을 표하는 은행이 수수료 부담을 들먹이며 신용카드를 외면하는 것은 앞뒤 안 맞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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