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23명 개신교 신자들의 무사 귀환을 온 국민은 바라고 있다. 하루 또 하루 협상 시한을 연장하는 탈레반 무장단체의 요구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피랍자들의 가족과 한마음이 돼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피랍자들이 소속된 분당 샘물교회의 담임목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원하지 않는 봉사활동은 중단하겠다”며 대 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머리를 숙였고, 한국이슬람교중앙회는 “이슬람의 가르침과 1,400년에 이르는 이슬람 역사에 있어 타 종교와 그 신자들에 대한 관용과 호의의 문화”를 되새기며 ‘아프간 무슬림 형제들’의 선의에 호소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런 한마음과는 달리, 또 피랍자들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선교’와 관련짓는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아프간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23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왜 그곳으로 갔는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내전에 국제전이 겹쳐 벌어지고 있는 아프간, 그리고 이라크는 한 마디로 문명 충돌의 현장이다. 이슬람 종파들 간의 전장, 제국주의 대 민족주의의 전장, 석유를 차지하려는 경제 전장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곳은 두 문명의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장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장이란 이야기다. 문명충돌론은 미국의 보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20세기말에 새삼 들고 나오기 전부터 인류사의 근본적 문제였다.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를 새긴 달러를 손에 든 미국ㆍ서구의 기독교 세력과, “금욕의 달들이 지나면 이교도들을 잡아 죽여라”는 코란을 손에 든 이슬람 세력의 충돌이다.
한국 개신교의 해외 파송 선교사는 170여개 국 1만6,000여명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두번째 규모다. 타 종교의 선교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이슬람권에서까지 공격적 선교활동을 함으로써 한국 교회 내부에서조차 무모한 양적 팽창주의, 정복주의적 행태로 비판받고 있는 한국 개신교도들이 왜 아프간에서, 자신들이 속한 교회 담임목사의 말대로 그곳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손님이 돼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가.
작가 황석영이 2000~2001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손님> 이란 소설이 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27일부터 12월 7일까지 황해도 신천에서 전체 군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383명의 주민이 학살된,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로도 알려진 이른바 신천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손님>
미 제국주의자의 학살로 이 사건 성격을 규정하는 북한의 입장과 달리, 황석영은 이 소설에서 신천사건의 원인은 우리 근대에 찾아온 두 손님 때문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두 손님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다. 신천사건은 전황에 따라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서로 살육을 벌였던 두 손님이 초래한 비극이었다는 것이다.
손님은 ‘손님마마’로 불렸던 천연두의 속칭이다. 천연두라는 손님이 수없이 많은 생명을 앗아갔듯, ‘개화’로 포장된 외래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주인의 몸에 뿌리를 내리면서 손님과 주인, 손님과 손님의 싸움이 피의 보복극을 불렀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데올로기 충돌의 질곡에 옥죄여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이 문명 충돌의 언저리에 또 얼쩡거려서야 되겠는가. 종교를 바탕에 깐 충돌은 이데올로기의 충돌보다 훨씬 뿌리 깊고 그 결과는 더 처참하다는 것을 역사와 현실은 보여주고 있다. 원하지 않는 손님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피랍자들의 무사 귀국을 다시 기원한다.
하종오 문화부 부장대우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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