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월, 전남 신안군 도덕도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최모씨의 그물에 굴껍데기와 뻘흙이 잔뜩 들러붙은 항아리 하나가 걸렸다. 조심스레 씻어보니 청자였다.
군청 문화재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서울에서 찾아온 골동품 상인은 원나라 룽취안 가마에서 만들어진 진품이라고 했다. 4월, 다른 어부가 같은 지점에서 청자와 백자들을 건져올리자 신안 앞바다에 보물선이 잠겨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전국에서 도굴꾼들이 몰려들었다.
뒤늦게 수사에 나선 경찰이 그들의 창고를 덮쳤을 때 그 안에선 국보급 보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문화재관리국은 10월에야 ‘신안 해저 유물 발굴 조사단’을 만들고 보물선을 찾기 시작했고, 고려 충숙왕 10년(1323년) 중국 닝포항에서 무역품을 싣고 일본으로 가던 원나라 배 한 척이 발견됐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중발굴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우리나라에 수중고고학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신안선은 8년에 걸쳐 2만3,000여점의 유물을 토해냈지만 중국 국적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신안선에서 나온 건 대부분 송ㆍ원나라의 청자들이어서 우리나라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유물은 많지 않았다.
국내 첫 해저 ‘보물선’인 완도선이 발견된 것은 1983년.
11세기 무렵 고려선박으로 추정되는 완도선에서는 고려청자 3만점이 쏟아져나왔다. 1995년에는 고려 말기인 14세기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포 달리도선이 발굴됐다. 이후 고선박 발견 소식은 한동안 뜸했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군산 십이동파도선(2004년)을 시작으로 신안 안좌선(2005년), 안산 대부도선(2006년)에 이르기까지 3년 연속 고려시대 침몰 선박이 줄줄이 발견, 인양된 것.
그러나 유물로서의 가치를 지닌 고려청자를 잉태한 배는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뿐이었다. 그것도 이번에 태안선에서 쏟아져나온 최상급의 청자들에 비하면 질이 매우 낮은 것들이다. 이번 보물선 발굴에 고고학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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