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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11> 첩보원처럼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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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11> 첩보원처럼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향하다

입력
2007.07.24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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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12일, 드디어 떠나는 날이다. 며칠 전 해외출장을 다녀온다고 집에 얘기했더니 아내는 행선지를 물었다. 대답을 안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추운 지방이냐 더운 지방이냐는 물음에도 묵비권을 행사했다.

집사람은 여름옷과 겨울옷을 모두 챙겨줬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옥 장관은 나에게 수교교섭임무를 맡기면서 “집사람에게도 비밀을 엄수하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오전 9시 혼자 대한항공 617편으로 홍콩으로 향했다. 그랜드 타워 호텔 923호실에 투숙한 뒤 방문을 2중으로 잠그고 룸서비스로 식사를 하면서 자료를 검토했다.

베이징 한국무역대표부에 파견돼 있는 김하중 참사관을 제외하고 동해사업 제1차 예비회담에 참석하는 5명중 신정승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과 이영백 사무관은 도쿄, 변종규 비서관과 한영택 수석연구관은 텐진(天津)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 5월13일 비슷한 시간에 합류했다. 모두 안기부 K차장이 직접 챙겨준 루트에 따라 여행을 한 것이다.

나는 5월13일 오전 8시35분 드래건 에어 328편에 탑승했다. 11시 25분 베이징 공항에 도착하니 장루이지에(張瑞杰)대사가 트랩 밑에서 리빈(李濱) 조선처장(한국과장), 싱하이밍(邢海明) 통역과 함께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가 탄 자동차는 버드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칠게 포장된 넓지 않은 도로를 따라 시내로 들어와 넓은 장안대로를 거쳐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에 도착했다. 생전 처음 밟는 중국 땅 베이징은 엷은 안개에 쌓여 있는 듯 회색의 낡은 건물들과 표정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무거운 인상을 주었다.

따로 출발했던 대표단원들과 댜오위타이 14루에 합류해 2층 전체를 우리대표단의 숙소로 여장을 풀었다. 중국대표단은 회의장과 식당, 응접실을 갖춘 1층을 숙소로 썼다. 댜오이타이 구내에 사실상 연금된 셈인데 반대쪽에는 북한대표단이 와 있다고 중국 측이 겁을 줘서 그나마 14루 주위로 행동반경이 제한된 기분이었다. 14루는 말하자면 적진 한가운데였다.

보안을 위해 한영택 수석연구관만을 데리고 14루 양원각(養源閣) 주변을 산책하면서 중국 측의 심중을 헤아려 보았다. 왜 중국은 이 시기를 택해 수교교섭을 제의 했을까?

나의 판단으로는 ▲노태우대통령 임기만료 전 ▲북한 김일성주석 생전 ▲덩샤오핑(鄧少平)옹 생전 ▲남북통일 전의 4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1989년 6월 텐안먼(天安門)사태이후 서방측의 경제제재라고 추측되었다.

이날 오후 베이징주재 한국무역대표부 노재원(盧載源)대사가 찾아왔다. 선배인 노 대사와 함께 14루 밖 정원으로 나갔다. 노 대사는 비록 무역대표자격이었지만 사실상 대한민국의 외교대표인 셈이었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한편 중조(中朝)우호조약과 대만문제 등에 대해 노 대사는 전략가로서 탁견을 제시했다.

대만이 자본력을 동원하여 아프리카 약소국 등을 대상으로 경제외교를 집중하는 시기에 수교국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한국과의 관계를 끊음으로써 대만외교의 숨통을 조이려는 중국의 의도도 주요 동기라고 풀이했다. 직업외교관으로서 정치적 고려 없이 국가와 국민 그리고 역사 앞에 최선을 다해 교섭을 했다는 기록을 남기라고 선배로서 충고도 했다.

예비회담을 준비하면서 나는 두 가지 문제가 무척 궁금했다. 이번 회담이 궁금증을 풀 기회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첫째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혈맹지우(血盟之友)로 인식해왔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과 중조우호조약의 스테이터스(status)와 그 내용에 대한 관심이다.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이한 사항이 있다면 한중수교회담 과정에서 모두 거론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평등호혜의 원칙이 남북한 모두에 동등하게 적용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베이징에 설치할 대한민국 대사관 부지에 대한 해결방안이었다. 조선시대 말 현재의 명동 대사관 부지를 청나라에 제공했을 당시 베이징에는 고종황제의 내탕금으로 현재 동교 민항자리에 대한제국 공사관을 매입한 적이 있다. 이 공사관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소유권도 일본의 손으로 넘어갔다.

명동의 중국대사관 부지문제와 베이징에 개설할 대한민국 대사관 부지에 대한 호혜평등원칙에 입각한 중국 측의 생각을 들어볼 계획을 세웠다.

일단 수교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결심이 서서 먼저 수교교섭을 제의한 마당에 우리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할 얘기를 다 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에 더 나아가 천년대계를 위해 모든 악역까지 도맡을 각오를 했다.

한중청소년문화협회(미래숲)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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