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30일, 도운길(45)씨는 22년 6개월 동안 다닌 회사로부터 구조조정 통보를 받았다. 섬유업체에서 폐수와 시설을 관리했던 도씨의 상실감은 무척이나 컸다. 고졸 출신인 그는 “군 제대 후 곧바로 들어가 내 청춘을 다 바친 회사였기에 해고 통보를 좀체 실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재취업 전선에서 겪은 좌절감은 더욱 쓰라렸다. 그는 20년 넘게 오직 한 직장만 다니다 나온 ‘준비 안된 구직자’일 뿐이었다.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냈지만 면접을 오라는 곳은 거의 없었다.
부산이 집인 그는 공장 폐수 등 수질관리 업무 경력을 살리기 위해 충청 경기 등 타지의 기업체에도 기웃거려 봤지만 허사였다. 맞는 일자리가 없거나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걸리기 일쑤였다. 다른 조건이 맞으면 업체에서 부르는 연봉 액수가 너무 적어 일이 틀어졌다.
도씨는 “특히 가족들 보기가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아침에 보험설계사를 하는 동갑내기 아내 정영숙(45)씨가 출근하고 두 아들 종환(16ㆍ고1) 성환(13ㆍ초6)군이 등교하면 도씨는 덩그러니 빈집을 지켰다. 그는 “멍하니 집에 혼자 있으면 정말 막막하고 답답했다”며 “몇 달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잡아 먹다 보니 사람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남편의 실직에 대해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내와 실업자 아빠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 더 좋다”며 어른 티를 내는 아들 녀석들을 보고 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도씨는 “축 처진 어깨를 쫙 펼 수 있었던 건 현실을 직시하고 재취업에 대한 눈높이를 낮춘 덕분”이라며 웃었다. 그는 3월 부산 진구 전포동에 있는 6층짜리 상가 건물의 시설반장으로 취직했다. 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이 운영하는 취업사이트 워크넷(www.work.go.kr)을 통해 얻은 일자리다.
형광등 교체에서부터 배관 누수 점검까지 건물의 모든 시설을 관리한다. 전 직장에서도 해 온 일들이라 업무가 낯설거나 부담은 전혀 없다.
그러나 연봉은 확 쪼그라들었다. 전 직장의 3분의1인 1,600만원 정도다. 도씨는 그러나 “받는 돈은 많이 줄었어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며 “일자리는 있지만 연봉이나 근로 조건이 안 맞아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눈높이를 낮춰 일단 취직부터 하고 나중을 준비하라’고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왕년에라는 생각에 갇혀 잘 나갔던 과거에만 집착하고 계속 버티다 보면 점점 무기력해지기만 할 뿐 재취업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도씨는 “비록 연봉은 줄었어도 희망만큼은 쑥쑥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위험물 처리 기능장과 보일러 기능장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그의 꿈은 자격증을 따 실업자 직업훈련학교에서 훈련 교사를 하는 것이다. 그는 “실업자들과 함께 실직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새로운 인생 찾기를 돕기 위해 내가 배운 기술을 성의껏 가르쳐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4050세대 재취업 걸림돌/ "화려했던 왕년은 잊으세요"
40,50대들의 재취업이 어려운 것은 과거 자신의 화려한 경력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내가 대기업 임원이었는데” “내 연봉이 얼마였는데”라며 비교적 임금이 높은 일반 관리직이나 사무직을 원한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재취업을 원한다면 눈높이를 최대한 낮춰 경비직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도전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체면을 앞세우지 말고 보수가 적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경력을 발휘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전직지원서비스업체 제이엠커리어의 서용원 팀장은 “과거에 집착하다 보면 직장을 찾기 힘들다”며 “실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구직자의 심리는 위축되고 재취업의 문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중소기업에라도 일단 취직하면 더 나은 곳으로 옮길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초조한 마음에 “우선 들어가고 보자”는 식으로 아무 곳에나 입사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경우 대부분 조건과 업무가 맞지 않아 금방 퇴사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경력에 상관없이 무조건 눈높이를 낮췄다가는 오히려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면서 경력 관리를 망치게 돼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이기찬 차장은 “40,50대 구직자 중에는 ‘당장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서’ ‘노는 게 지겨워서’ 등의 이유로 무턱대고 아무 일자리나 잡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나 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경력과 능력을 살리지 못함으로써 재취업 고용 시장에서 낙오자로 전락하는 치명적인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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