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지하 강당.
불이 꺼진 채 스크린 속 배우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어디로 바삐 움직인다. 언뜻 보면 여느 동네 소극장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영화 중간중간 배우가 아닌 성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성우는 배우가 무엇을 타고 어디로 가는지 벽지는 어떤 색깔이고 분위기는 어떤지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 준다. 자리를 빼곡이 채운 80여 명의 관객들은 숨 죽인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영화에 빠져들었다.
이날은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의 특별한 시사회가 열렸다. 복지관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 영화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시각장애인은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
시각장애인 김모(46)씨는 “공식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라고는 ‘장애인 영화제’ 출품을 위해 별도로 만든 작품이 대부분”이라며 “일반인들이 극장에서 관람하는 개봉작은 저작권이나 음원사용권 문제 때문에 몰래 만들어 ‘쉬쉬’ 하면서 본 게 전부였다”고 설명했다.
이번 시사회가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시각장애인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떳떳하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는 이유 때문이다. 배우의 목소리만 들릴 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시각장애인들은 영화의 흐름을 따라잡기 힘든 게 현실이다. 또 음원사용권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복제 CD 등을 구입하면 불법이다. 시사회는 두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준 셈이다.
이는 복지관의 힘겨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노현준 사회복지사는 “여섯 달 넘게 걸린 대작업이었다”고 했다. 그는 “화면 해설용 원고를 써 줄 작가와 읽어 줄 성우를 찾는데 몇 달이 걸렸다”며 “작가와 성우 모두 장애인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수고료를 거의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금 마련과 음원을 포함한 저작권 문제 해결도 쉽지 않았다. 노 복지사는 “다행히 다음세대재단에서 아이디어를 듣고 적극 돕겠다고 했고 CJ엔터테인먼트 쪽에서도 흔쾌히 음원 사용을 허락했다”며 “힘들었지만 너무 뜻 깊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관객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노원구 상계동에서 온 노소영(36ㆍ여)씨는“친구들이 보고 나서 감동 받았다던 그 영화를 이렇게 소리로 보니 너무 좋았다”며 “이제 친구들과 영화에 대해 한바탕 이야기 잔치를 벌여야 겠다”고 했다. 관악구 신림동의 김모(65) 할아버지는 “내 평생 영화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양로원가서 영감들한테 자랑 할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복지관은 이미 극장에서 개봉했던 한국 영화 12편을 화면 해설 영화로 다시 만들어 담겨 있는 CD를 나눠줬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관람객들의 얼굴에는 웃음 꽃이 피었다. 경기 시흥의 김영명(26) 씨는 “이 감동을 집에서도 두고두고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오늘 오지 못한 다른 시각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봐야 겠다”고 말했다.
복지관 측은 하반기에도 또 다른 영화 12편을 시각장애인 용으로 만들 계획이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김재욱 인턴기자(연세대 사회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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