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를 오르며 누구나 한 번쯤 궁금해 하는, 설사 이름은 몰라도 꼭 마음속에 담아두고 기억할 수밖에 없는 나무가 있다. 바로 ‘히말라야만병초’이다. 물론 지난번 이름 붙인 긴잎소나무, 히말라야잣나무처럼 내가 붙인 이름이다. 진달래와 같은 집안으로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타원형의 상록성 긴 잎을 가진 것을 흔히 만병초류 또는 로도덴드론(Rhododendron)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엔 희거나 연한 분홍색 꽃이 피는 만병초와 설악산과 백두산에 피는 노란만병초가 있다.
히말라야엔 이 종류의 식물들이 20여 종류나 된다. 아주 연한 분홍색과 진한 빨간색, 더러 노란색도 있다. 마치 나무의 가지 끝마다 신부의 부케를 매달듯, 진 녹색 잎새 위에 적절히 벌어진 탐스럽고 더없이 아름다운 꽃송이가 달린다. 이 화사한 꽃은 설산을 먼발치에 두고 산으로 오르는 길 내내 헤아릴 수 없이 자주 만난다.
히말라야만병초는 사실 내가 그 산을 향했을 때 가장 보고 싶었던 식물 중 하나이다. 여러 해 전, 우리 식물들만 알고 살다가 나라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서양의 유서 깊은 최고의 식물원이나 품격있는 정원에서 만난 가장 감동적인 식물이 바로 이 만병초들이었다. 이렇게 화려하면서도 깊이 있는 식물이 있을까 했는데 알고 보니 그 특별한 꽃나무들 상당수의 고향이 바로 이곳 히말라야이거나 중국의 윈난(운남)성이라고 한다. 원 고향에서 야생의 만병초를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만병초들의 꽃송이를 바라보며 한걸음 한걸음 산길을 걷노라니 멀게는 이백년전, 가깝게는 수 십년 전 신들의 영역에 찾아와 이 특별한 식물들을 만났을 식물탐험가들의 고행과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하다.
히말라야만병초뿐이 아니다. 그리 길지 않은 산행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 만난 이곳을 고향으로 한 세계의 꽃들은 여럿이다. 우리에겐 뿔남천이라고 알려진 마호니아도 보이고, 종 같은 꽃송이들을 줄줄이 매어달고 있는 피어리스도 이곳 저곳에 지천이다. 향이 유독 짙은 백서향, 프리뮬라(앵초)의 종류도 다양했다.
지금 정원에서 만나는 상당수의 식물이 히말라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우리가 히말라야의 식물에 관심을 두는 숨은 이유중 하나다. 한 발 늦었지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며 아직 무궁한 이곳의 식물을 자원으로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네팔의 국화(國花)는 랄리 글라스(Lali Gurans). 수 십 종류의 만병초 가운데 꽃 빛이 유난히 진하고, 쉽게 많이 볼 수 있는 아보레움만병초(Rhododendron arboreum)이다. 산을 오를 때에는 꽃이 하나 둘씩 피기 시작하더니 내려오는 길엔 눈에 띄게 꽃송이들이 늘어났다. 박영석 원정대가 에베레스트에 코리안 루트를 만들고 돌아올 수 있었다면 분명 이 꽃들은 그 즈음, 개선의 발길을 축하하는 꽃터널이 되었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꿈이 아쉽고 함께 돌아오지 못한 발길이 더욱 가슴을 저미게 한다.
하지만 그 설산에 묻은 수많은 아픔들이 다시 희망과 도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핏빛의 아름다운 꽃송이들은 매년 산악인들의 발길이 시작되는 그 즈음 피어날 것이고, 산악인들의 도전 정신은 이 꽃들이 세계의 꽃이 되어 퍼져가듯 우리 모두의 마음에 남아있을 것이다.
국립수목원 연구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