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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7>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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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7>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입력
2007.07.1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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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22세의 젊은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서울 청계 6가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 자살한다.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 그는 하루 서너 시간 밖에 잠을 못 자면서 일해야 하는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에 항의, 자신의 희망이던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생명을 불태웠다. 이 땅에 근로기준법이 최초로 제정된 것은 1953년. 국가의 법이 규정한 하루 8시간 노동을 지키고 이를 초과하는 노동에 대해서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을,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동자’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 어렵고 노동의 정당한 대가마저 경제 개발이란 미명 하에 포기하도록 강요했던 개발독재 시대는 이 젊은 노동자의 절규에 귀를 막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이 사건은 한국일보 사회면 톱기사로 실리면서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된다. 그의 분신 이후 대학생들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그동안 재갈이 물렸던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게 된다.

<전태일 평전> 은 평화시장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짧은 일생을 정리한 책이다. 전태일이 자신의 육신을 불살라 노동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면, <전태일 평전> 은 전태일이 스스로 노동자로 각성하게 되는 과정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려 했던 치열한 고민을 세상에 전하려 했다.

저자인 조영래의 서울대 법대 친구인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는 이 책이 갖는 현재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 이를 기록한 저자 모두는 시대적 산물입니다. 그동안 전태일의 비범한 삶과 죽음은 70, 80년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투사로서 강조되었어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전태일의 사상과 인간적인 면이 부각되면서 젊은 세대들도 쉽게 감동할 수 있는 책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전태일 평전> 을 출간한 한철희 돌베개 대표 역시 “최근 전태일은 인간에 대한 억압과 불의의 질서에 침묵하지 않고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저항한 휴머니스트로서 재조명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전태일의 삶과 정신에 영속성을 부여한 이는 바로 조영래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당시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장기표를 통해 전태일 분신 사건을 접하게 된다. 장기표는 일찌감치 노학 연대를 통한 사회 변혁을 꿈꾸던 학생운동가로서 전태일의 어머니이소선 여사로부터 전태일의 수기를 전달 받는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그는 이 수기를 조영래에게 전달했고, 조영래는 이소선 여사와 전태일의 동료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전태일 평전> 을 집필했다.

전태일의 분신이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70년대 학생운동권과 종교계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했고, 노동자들이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해 생존권 보장을 위한 운동을 실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70년대 후반에 일어난 YH사건, 동일방직사건 등도 전태일이 지펴 놓은 노동운동이 꺼지지 않도록 한 노동자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처럼 전태일의 분신은 70년대 노학연대의 기반을 마련하고 민주노동조합을 탄생시켰지만 그의 정신이 담긴 <전태일 평전> 은 국가 아닌 일본에서 78년 <불이여, 나를 감싸 안아라>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처음 나온다. 유신독재 권력의 서슬은 그의 삶과 정신을 담은 책의 존재조차 인정치 않았던 것이다. 국내에는 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이란 제목으로 저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출간됐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억압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출간 이후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지만 은밀한 경로를 통해 책을 접한 대학생, 노동자들의 가슴에 전한 울림은 대단했고, 이는 80년대 민주화와 민중생존권 투쟁에 밑거름 역할을 했다. 저자 조영래의 이름은 91년에야 비로소 밝힐 수 있게 된다.

전태일이 산화한 지 37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 낸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역할과 그에 대한 평가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심지어 대중과 여론의 냉소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 은 매년 2만부 가까이 판매될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운동가 이전에 전태일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이다. 어린 소녀들이 빛이 들지도 않고 환기도 되지 않는 비좁은 공간에서 각성제를 먹어가며 장기간 노동에 시달리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것에서 시작한 그의 노동 운동은, 그 어떤 노동 운동보다 순수하고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는 전태일의 수기는 그의 정신이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를 웅변한다.

■ 막역지우 장기표씨 회고 인권변호사 활약 故조영래 86년 부천 성고문 변론맡아

"조영래는 전태일을 부활시킨 사람입니다. 전태일을 예수에 비유한다면 조영래는 사도 바울이라고 할 수 있죠." <전태일평전> 의 저자인 조영래를 장기표(62) 새정치연대 대표는 이렇게 평가했다.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당시 조영래는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동료들과 달리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기표로부터 분신 소식을 들은 그는 곧바로 서울대 법대 학생장을 주도하고 시국선언문초안을 작성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열정만은 여전했던 것이다.

그는 이듬해 3월 사법시험에 합격하지만 사법연수원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이 사건으로 막역지우인 장 대표와 함께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조영래는 그 즈음, 장기표로부터 전태일의 수기를 건네 받는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장기표는 글 잘 쓰는 조영래에게 집필을 부탁하고, 조영래는 전태일의 생애와 사상을 글로 재구성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학생운동에 대한 열정,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가 3년 만에 완성한 원고가 바로 <전태일 평전> 이다.

<전태일 평전> 의 저자로 세상에 알려지기 전, 조영래는 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개소하면서 인권 변호사로서 활약한다. 그가 변론을 맡아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사건에는 84년 '망원동 수재 사건', 85년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89년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사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공권력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냄으로써 5공화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부천공단에 위장 취업한 서울대 제적생 권인숙에게 자행된 성고문 사건에서 조영래는 집요한 변론 끝에 정권이 은폐하려 한 진실을 밝혀낸다. 이 사건은 이듬해 2월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이처럼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대변혁기에 항상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앞장 섰던 조영래의 행적은, <전태일평전> 에서 드러나는 "어려운 이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전태일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조영래 연보

1947년 대구 출생

64년 경기고 3학년 재학 당시 한일회담 반대시위 주도로 정학

69년 서울대 법대 졸업

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으로 서울대 법대 학생장 주선 및 시국선언문 초안 작성

74~76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전태일 평전> 집필

83년 변호사 개업, 전태일 평전인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출간

84~89년 망원동 수재사건,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변론 담당

90년 폐암으로 사망

주요 저서 <전태일평전> , 유고집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등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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