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대금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어찌나 깊숙이 침투했던지, 돈 빌리는 조건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에 대한 의식조차 없었다. 시골에서는 파종 때 정미한 쌀 한 말을 빌리면 추수 때 무려 두 말 반을 돌려줘야 했다.…"
방글라데시의 빈민운동가이자 현대판 마이크로 크레디트(소액신용대출)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무하마드 유누스가 자서전(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2002)에서 빈민들에게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 부분이다.
무대만 다를 뿐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고리대금업의 폐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금융감독원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등록 대부업체의 평균 이자는 법정 상한선 66%에도 불구하고 181%에 달했고, 무등록 대부업체(불법 사채업자)는 217%나 됐다.
저(低) 신용자들의 금융애로가 사회문제가 되자 정부와 정치권, 은행들이 뒤늦게 이들을 위한 마이크로 크레디트를 확충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2000년 <신나는 조합> 이 그라민 은행으로부터 5만 달러를 지원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마이크로 크레디트 활동이 시작됐지만, 일반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유누스 총재가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한국을 방문하면서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됐다. 신나는>
그라민 은행의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고리대금에 옭매여 뼈 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글라데시의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들이 고리대금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소액(건당 평균 150달러)을 대출해줘 자립을 돕는 것이다. 1976년 사업을 시작해 지난 30년간 모두 52억 달러를 대출해 주고, 대출을 받은 빈민 600만 명 중 절반 이상이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라민 은행의 성공 비결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현장밀착주의'라 할만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은행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겁을 집어먹기 예사이다. 거리감도 느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람들 곁으로 가기로 했다." 초창기에는 지점마다 '직원이 사무실에 있는 것은 저희 그라민 은행의 내규에 어긋나는 일입니다'라고 써 붙여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철저한 시장적 접근이다. 유누스 총재는 자서전에서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빌린 돈을 상업적으로 활용해 불릴 수 있도록, 또 빌린 돈을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은행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대출 받은 사람을 매주 혹은 매월 한 차례씩 방문해서 재정상태와 대출금의 적절한 사용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 결과 대출금의 99%가 상환되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하나은행이 300억원의 기금을 출연해 박원순 변호사가 상임이사로 활동하는 시민단체 희망제작소와 함께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한다고 발표했다. 시민운동가로서 두터운 신뢰를 쌓아온 박 변호사가 참여한다니 우선 기대가 된다. 하지만 1인당 대출금액이 5,000만~1억원으로 커 기금이 조기에 고갈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기업의 사회공헌이라는 명분에 눌려 충분한 검토와 준비 없이 시작하는 것은 아니냐는 걱정이다. 그라민 은행의 성공사례를 보다 철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상철 경제부 차장대우 sc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