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 제도를 폐지한 가장 큰 이유는 획일적인 신용평가를 없애고, 금융기관의 신용평가 기법을 선진화하자는 취지였다. 평생 쫓아다니는 신용불량자 딱지를 없애 줌으로써 재활의 기회를 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제도나 시스템은 선진화했을지 몰라도, 내용적으로는 아직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일단 한번 신용 불량의 나락에 빠지면 재활의 기회를 잡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단적인 예가 조회 기록이다. 한 때 개인신용평가(CB)사가 신용평점을 산정할 때 30% 이상의 비중을 차지했던 조회 기록 비중은 최근 10~15% 수준으로 크게 낮아졌다. "대부업체에서 대출 조회 한 번만 하면 신용평점이 뚝 떨어져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비판 여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다. 개인신용평가시스템(CSS)에 조회 기록 항목을 넣어 자체 평점을 산정하는가 하면, 아예 대출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해 만든 필터링(Filtering) 항목에 조회 기록을 포함시켜 활용하기도 한다.
저신용자들은 대출이 안되니 금융회사를 자주 옮겨 다니면서 대출 조회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이것이 다시 신용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의 족쇄가 되는 것이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금융회사들의 조회 기록 활용 실태 조사에 나서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은행 등 대형 금융회사에 비해 상호저축은행 등 서민금융기관의 신용평가 기능이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100개가 넘는 저축은행 중 자체적인 여신심사 능력을 제대로 갖춘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은행이 흡수하지 못하는 저신용자에 대한 대출을 저축은행이 맡아줘야 하는데 심사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에만 매달리고 있다.
러시앤캐쉬, 산와머니 등 대형 일본계 대부업체들이 연 50~60%대 고금리로 장사를 하면서 연간 1,000억원에 가까운 순익을 내며 승승장구하는 것도 저축은행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돼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 당국 고위 관계자는 "일본계 대부업체에 저축은행이 고유 영역을 내주는 것은 결국 신용평가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 아니겠느냐"며 "하루 빨리 이들의 장점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용불량자의 재기를 돕기 위한 여러 부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신용회복위원회가 운영하는 신용회복 프로그램은 현재 1,000개가 넘는 금융회사가 협약에 가입해 있지만, 정작 대부업체는 2곳 뿐이다. 고금리 대부업체의 채무를 조정받지 못하다 보니 중도에 늘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의 부활을 지원할 수 있는 금융상품도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 파산 면책을 받은 최모씨는 "요즘 외환은행이 파산 면책자에게 예금을 담보로 신용카드를 발급해주기 시작해 너무 반가웠다"며 "금융회사들이 좀 더 이런 상품을 많이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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