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이 다가오다 보니 주위에서 많이들 물어옵니다. 혼자 숨겨두고 있는 비경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요. 사실 취재를 다니다 보면 과연 이곳을 일반에 널리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찾아올수록 손 때가 타고 훼손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분이 ‘기자’이다 보니 알려야 할 의무와 알리고 싶은 욕심이 늘 먼저라 제 가슴 속에만 담을 비경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삼척 무건리 이끼폭포와 봉화의 백천계곡도 제 흉중에 담아두고만 싶은 그런 곳입니다. 장롱 속 고이 간직한 옥가락지처럼 깊은 산중에 숨어 순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지요. 너무도 귀한 풍경으로 그 아름다움이 행여나 상할까 발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지는 곳들입니다.
■삼척 무건리 이끼폭포
이끼폭포가 있는 도계읍 무건리는 오지중의 오지. 일부러 험난한 산속을 헤매는 데서 재미를 얻는 이들이나 사진작가들만이 알음알음 찾아오는 첩첩의 산중이다. 삼척시에서 태백으로 올라가는 38번국도를 따라가다 도계읍 하고사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가 농로를 타고 계속 산으로 오른다. 석회석을 캐는 태영EMC 광산을 지나 현불사 앞 3거리에 이르니 콘크리트 포장길은 계속 산으로 이어졌지만 차단기로 가로막혀 차를 멈췄다.
더 올라가면 차 돌릴데도 마땅치 않아, 이곳에 주차하고는 걷기 시작했다. 1km 되는 포장길은 제법 경사가 있어 허벅지가 팍팍해온다. 포장길이 끝나면서 오르막도 끝난다. 이제부터는 딱 걷기 좋은 비포장의 숲길이 이어진다. 오른편으로 뻥 뚫린 시야엔 첩첩의 산줄기가 늘어섰고 뽕나무에서 지난밤 비를 맞고 떨어진 오디가 질퍽한 길바닥을 자줏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길가에선 기린초, 나리 등 토종의 풀꽃이 피어났고, 산 능선 밤나무들의 수북이 피어난 밤꽃에선 진득한 향이 번져 나왔다.
비포장길을 한 40분쯤 걸었나. 왼쪽 산비탈에서 민가들이 보인다. 이곳의 지명은 큰말. 6채의 집이 있지만 모두 비었다. 삼척이나 태백 등에 거주하며 농사지을 때 잠시 올라와 농막으로 사용하는 집들이다.
농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끼폭포’가 쓰여진 작은 팻말이 풀숲 우거진 오솔길을 가리킨다. 길의 경사가 급하다. 어제 내린 비로 길은 더욱 미끄럽다. 누가 설치해놓은 자일이 있어 의지해 보지만, 여러 번 엉덩방아를 찧고서야 계곡으로 내려갈 수가 있었다.
길이 끝나고 마침내 열린 시야로 들어온 것은 믿겨지지 않는 천국의 모습. 연초록 이끼 가득한 높이 7~8m 되는 절벽 위로 여러 갈래 물줄기가 흘러내려 청초록빛 은은한 말간 소 위로 떨어진다.
폭포 오른쪽 높이 10m 되는 산비탈은 더욱 진한 초록의 세상. 이곳에도 두 개의 물줄기가 가늘게 흘러 초록의 이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잘못 다가갔다가는 바스러질 것 같은 초록 정령의 세상. 감히 그곳에 발을 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폭포 왼쪽 절벽 위에는 밧줄로 된 사다리가 걸쳐져 있다. 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더 황홀한 경치가 숨어있다고 한다. 하지만 불어난 물로 사다리까지 접근이 쉽지 않다. 이 정도의 풍경만으로 충분히 벅찼기에 더 이상 무리를 하지 않기로 했다. 폭포에 작별을 고하고 오솔길로 되돌아서는데 그제서야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황홀경에 취해 잊고 있었던 이끼폭포의 물소리 말이다.
■봉화 백천계곡
무건리 이끼폭포와 멀지않은 곳에 국내 계곡중 가장 청정하다고 자부할 만한 명품 계곡이 있다. 계곡 자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북 봉화군 석포면의 백천계곡이다. 백두대간 자락 부쇠봉 진대봉 청옥산 두리봉 문수봉 조록바위봉 등에서 고아낸 물이 한데 모여 이룬 15km 길이의 계곡으로 낙동강의 최상류 지류 중 하나다.
인적 드문 백천계곡의 주인은 어른 팔뚝만한 열목어(熱目魚)라는 청정물고기. 물이 맑고 차가운 계곡에서만 사는 희귀종이다. 옛날 사람들은 열목어의 눈이 붉은 것은 이름처럼 눈에 열이 많기 때문이며,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찬물을 찾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터전에선 수온이 한여름에도 20도 이상 올라가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계곡은 햇빛이 물에 닿지 않게 나무가 우거져야 한다. 세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인 백천계곡이 그런 곳이다.
천연기념물이다 보니 다른 계곡과 달리 이곳에선 야영, 취사, 물놀이가 금지됐다. 덕분에 지금의 청정 계곡이 유지될 수 있었다.
봉화 소천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태백으로 올라가면서 청옥산휴양림을 지나 국도변 대현분교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백천계곡을 끼고 사는 마을 대현리다. 계곡을 따라 3km 가량 들어가면 현불사. 이곳에서 계곡과 나란히 난 임도를 따라 백천계곡의 싱그러움을 만끽하는 트레킹이 시작된다.
임도는 일제때 만들어졌다. 금강송을 베어 내가기 위해 만든 산판도로다. 계곡의 입구는 마치 금강산에 온듯 깎아지른 절벽의 牡?위에 뿌리내린 아름드리 금강송들의 모습이 장관이다.
현불사 주차장에서 20여분 걸으며 드문드문 늘어선 5채의 민가를 지나자 차량 통행을 금지하는 차단기가 길을 막고 서있다. 이곳부터는 사람이 전혀 거주하지 않는 자연만의 공간. 길은 짙은 초록의 터널이다. 한여름 대낮인데도 살갗엔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하고, 삼각대가 없으면 사진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둑하다.
열목어가 마음 놓고 살수 있는 이곳에는 수달도, 고라니도 지천이다. 마을 주민 이석천(58)씨는 “먹을 게 많은 숲이다 보니 이곳 멧돼지는 유순해 농작물이나 사람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며 “워낙 인적이 없다 보니 비무장지대와 다름없는 자연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라고 자랑했다.
백천계곡 길을 타고 계속 산속으로 오르면 태백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만난다. 작년 말 봉화군에서 조성한 길이다. 문수봉, 부쇠봉을 거쳐 태백산 천제단에 오를 수 있다.
답사전문 승우여행사는 매주 토요일 하루 일정으로 백천계곡에 트레킹을 떠난다. 회비는 어른 3만3,000원, 어린이 2만9,000원. (02)720-8311
삼척ㆍ봉화=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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