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막스 베버는 정치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각을 꼽았다. 뻔한 공자 말씀처럼 들리지만, 너도나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우리 정치인들의 자질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을 만하다.
거창한 포부와 공약의 진실성을 정확하게 살피기 어려운 만큼, 여러 가지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는 유권자라면 결국 베버와 비슷한 안목으로 대통령감을 분별하지 않을까 싶다. 국민이 지금 정부와 대통령에게 실망하고 낙담한 근본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 것으로 본다.
● 감동없는 한나라당 후보 검증
새삼스레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정권 교체를 자신하는 한나라당의 후보 경선이 엉뚱하게 빗나가는 느낌이 들어서다. 유력 주자와 군소 후보들이 저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헌신을 되뇌지만, 그 진실된 열정과 책임감과 균형감각에 감동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경선 후보들이 여러 차례 TV 토론에서 제법 치열한 공방을 하고, 개별 후보의 각종 비리 의혹에 대한 검증 논란을 지속한 것이 유권자의 관심과 지지를 높인 것 같지도 않다.
일단 당내 경쟁자를 꺾는 게 관건이고, 국민의 감동과 지지는 그 다음 신경 쓸 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야당 대선주자들이 초장부터 진부한 다툼에 매달려 국민을 지루하게 하는 것은 보기 딱하다. 그 모습에 식상하고 싫증난 국민이 늘면 어떻게 될지, 미리 잘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한나라당 경선 국면의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된 경부대운하 논쟁이 오히려 국민을 지루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개별후보의 이해득실을 떠나 대운하의 국가적 필요성과 경제적 타당성을 유권자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불가능한 데다, 그 것이 국민의 일상적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바로 보지 않은 채 모든 후보와 언론이 당연히 최대 쟁점으로 삼은 것은 사안의 본질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경부운하 논쟁을 더러 과거 경부고속도로 건설 논쟁과 비교한다. 둘 다 '단군이래 최대역사'라 이를 만한데다, 타당성을 놓고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엇갈리는 점이 비슷하다.
그러나 40년 전 고속도로 건설이 국가발전을 위해 절실하다는 국정 책임자의 소신과 열정과 책임감을 기울인 대역사라면, 경부운하는 그처럼 절박한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대선 공약일 뿐이라는 점부터 다르다.
경부운하가 아무리 '실현되면 좋은 구상'이거나 '낭비와 재앙을 낳을 몽상'일지라도, 지금 온통 거기에 매달려 다툴 일은 아닌 것이다.
당장 긴요한 국민의 삶을 돌보는 열정과 책임감을 겨루기보다, 시비를 가리기 힘든 운하 논쟁을 계속하는 것은 안이하다. 여기에 도덕성 검증을 명분으로 온갖 잡다한 의혹을 들추는데 몰두하는 모습은 오만하게 보일 정도다.
국민이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진정한 관심이 없고, 오직 경선 승리만 염두에 둔 듯한 자세로 폭 넓은 지지를 기대한다면 어리석다. 한나라당 전체가 지레 대운하 물 속에 침몰하거나, 검증 암초에 걸려 오도가도 못할 수 있다는 경고를 흘려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 국민 삶 바꿀 열정ㆍ비전 보여야
물론 한나라당 주자들의 실패를 국가적 불행으로 여길 일은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사회 변화와 시대 요구를 바로 보지 못한 교훈을 깨닫지 못했다면 다시 실패하는 게 바람직할 수도 있다.
다만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역 계층 남북 등으로 찢긴 사회의 갈등을 완화하고 진정한 화합의 길로 이끌 열정과 책임감과 균형감각을 지닌 지도자를 못내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이회창 후보의 실패는 언론과 검찰까지 가세한 '김대업 사기극'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사회 다수를 차지하는 서민 등 모든 억눌린 계층을 먼저 돌보는 진실된 열정과 비전을 보이지 못한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 욕구를 업고 집권한 대통령이 기대를 배신해 신망을 잃었다고
해서, 한나라당 주자들이 기우뚱대는 '경선 뱃놀이'를 즐기는 것은 한심하다. 양극화 집값 일자리 교육 세금 고령화 등 일상의 삶과 복지를 정성껏 논해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