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직업을 지칭하는 단순한 의미였던 농민의 정의가 법적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미 수십조원의 농가지원금을 쏟아 부어온 정부는 앞으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피해지원과 구조조정 촉진을 위해 폐업자금지원 등 막대한 자금을 준비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지원의 혜택을 받아야 하는가는 문제를 정교하게 결정하는 것은 농업 뿐 아니라 전체 개방정책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농민의 정의가 모호해 직장인도 지원혜택을 받는‘농민’으로 둔갑하고, 지원이 절실한 ‘진짜 농민’은 뒤로 밀리는 문제점이 불거졌다.
‘누가 진정한 농민인가’를 가리는 것은 어제 오늘 일어난 논란이 아니다. 법제처는 이미 2005년 농림부에 ‘농민의 정의’ 강화를 권고한 바 있다. 본업이 따로 있는 직장인이 1,000㎡(약 303평) 이상 농지를 경작하거나, 90일 이상 농사를 짓는 것 중 한가지만 충족하면 면세유나, 자녀 교육비 지원 등 농업에 전념하는 농민과 같은 수준의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었다.
90일로 돼 있는 연간 경작일 기준을 120일로 상향하는 방안이 권고의 주요 내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90일은 1년간 토ㆍ일 주말을 합친 것보다도 짧은 기간이다.
주말마다 농사를 꾸준히 지으면 누구나 연 경작일 90일을 훌쩍 넘길 수 있다. 직장인이나, 심지어 사업가 등 자산가도 버젓이 농민으로 분류되는 폐해가 이래서 나온다.
감사원도 이 같은 기준으로 농민을 분류해 지원하고 있는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의 운용과 관련해 이의를 제기했다. 감사원은 지난해 농신보에 “주말농장이나 부업ㆍ취미 등 일시적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농지를 1,000㎡ 이상 경영하더라도 농업과 무관한 직업을 주업으로 하는 회사원 등 담보능력이 있는 직장인에 대해서는 보증적격 우선순위를 낮춰야 한다”고 농협에 통보했다.
농신보는 직업을 가진 부업농에게도 보증을 서오면서, 2004년 기금잔액대비 신용보증잔액이 67.5배에 이를 정도로 건전성이 악화됐고 지난 해에는 보증사고로 대신 갚아준 총 금액이 연간 1조원을 돌파했다.
농림부도 법제처나 감사원의 문제제기에는 공감한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해결책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설명이다. 만약 단순히 농민의 기준이 되는 경작기간을 90일에서 120일로 늘리거나, 경작규모를 늘리거나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지원이 가장 절실한 영세농이 제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농업 외에 본업을 가지고 있는 지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방안도 직업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농림부 관계자는 “농업에 종사한다는 일반적인 개념하고, 정부로부터 사업별 혜택을 받는 대상은 분리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이를 함께 쓰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각 정부사업을 시행하는 주체들이 적용대상이 되는 농민을 별도로 규정할 수 있는데도 편의를 위해 농업ㆍ농촌기본법 시행령의 기준을 그대로 끌어다 쓰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향후 정부지원 혜택을 받는 대상을 따로 규정하는 ‘농업경영체육성법’ 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성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농민의 정의 자체를 바꾸는 것은 상당한 혼란이 있을 수 있다”며 “정책수혜 대상에서 고소득 농가, 농업수익 의존도가 낮은 가구는 배제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 농업구조개선사업 10년간 69조 투입
# 부동산 등 비농업용 자산이 20억원에 이르는 자산가 A씨(경기 고양)는 2004년 농업용 부채 3억원에 대해 우대금리로 상환을 연기 받았다. 농협은 등기소만 통해도 확인할 수 있는 자산을 파악하지 않은 채 그를 '부채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분류했다.
# 경기 광주에서 소 중간 매매상을 하는 B씨. 그는 2004~2005년 53회에 걸쳐 한우품질고급화 장려금 1,400여원을 받았다. 한우 생산자에게만 지원하는 자금이지만, '생산자 확인 증명서' 발급 기준이 명확치 않은 점을 이용한 것이다.
농가지원대책의 문제가 직장인ㆍ일반자영업자까지 농민으로 둔갑할 수 있는 제도상의 헛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 자산가, 공무원ㆍ교사 등 현재 규정으로도 지원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불법ㆍ편법적으로 지원금이 집행돼 왔다.
정부가 1992년부터 10년간 1단계 농업구조개선사업에 투입한 투ㆍ융자 자금은 69조원. 지난해 감사원이 69조원의 집행실태에 대한 감사를 벌였다. 그 결과 부채상환 능력이 없는 농가에게 정부가 우대금리를 적용해 상환을 연기해주는 '부채경감정책'은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까지 지원하고 있었다.
콘도회원권 소유자, 비농업용 부동산 소유자 등 부채상황능력이 충분한 58명과, 농민 자격을 가지고 있지만 부부합산급여가 농가평균소득 이상인 공무원, 교사 등 안정적인 직장인 약 9,700명에게까지 지원이 됐다.
9,700명 중에는 직업에 상관없이 지원요건이 되는 전업농(논농사 30ha, 한우 50두 등)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대다수가 불법이었다. 농림부는 "향후 지방세 명세서를 제출하게 하는 등 자산보유 확인을 강화하기로 했다"며 "직업ㆍ급여 등도 건강보험공단에 의뢰해서 일괄조회토록 했다"고 말했다.
농가 투ㆍ융자 사업의 집행기관인 농협의 도덕적 해이도 심각했다. 농협중앙회에서 관리하는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농신보)은 2005년 피보증자의 대출금을 대신 갚아준 후, 버젓이 농협에 다니고 있는 당자사의 직장파악이 안 된다는 이유로 구상권 행사를 하지 않고 있다가 감사원에 적발됐다.
22개 지역농협이 화학비료 공급업체와 공모해서 매입ㆍ매출전표를 허위기재해 국고보조금 16억원을 부당지급 받은 사실도 감사원 조사에서 드러났다. 지역농협 중 일부만을 조사한 결과 여서, 실제로는 더 많은 국고보조금이 새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 11월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창원농민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투융자 사업을 조금만 파악해보면 열심히 일하는 농민들이 소외되고 더욱 어려운 현실로 내몰리고 있다"고 한탄했다.
창원농민회는 김영삼 정부때 예산 5억원을 받아 설립했지만 당시까지 전혀 가동이 되지 않고 있는 밀가루공장, 3억원을 지원 받은 농산물 집하장을 포함해 창원지역에만 방치된 농산물 집하장이 30여 곳에 이르는 사례 등을 들며 개탄했다.
정부는 현재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되는 1단계 사업을 끝내고, 2013년까지 119조원이 투입되는 2단계 사업(농업ㆍ농촌종합대책)을 2004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2단계 사업은 3년마다 한번씩 평가하고 조정하도록 돼 있다"며 "현재 조정작업을 거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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