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금요일 오후 9시. 젊음과 패션의 거리, 서울 압구정동에 난데 없이 양복부대가 출동했다. 레게 머리와 힙합패션 대신 말쑥한 양복 차림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 엘리트라는 자부심으로 무장한 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들어간 곳은 ‘압구정 클럽’. 바도 아닌 클럽에서 저녁 회식이라도 하나 싶었지만 웬걸, 1만원짜리 입장권을 든 채 어두컴컴한 클럽을 꽉 채운 그들은 이미 엉덩이를 들썩이고 야광봉을 흔들며 열광에 휩싸이고 있었다. 직장인 록밴드 노마티브 밴드의 첫 공식 데뷔무대다.
‘록밴드의 클럽 공연과 직장인’, 이 이색적인 조합을 만들어 낸 주인공은 전략컨설팅 업체 베인앤컴퍼니의 사내 록그룹 ‘노마티브 밴드(Normative Band)’이다. 밴드 멤버들은 이 업체경영 컨설턴트들이다. 이 날 무대는 이들의 첫 번째 정식 유료 공연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동료들끼리 작당을 해서 2002년 처음 밴드를 결성하고 그 해 겨울 회사 크리스마스 파티 때 첫 선을 보였습니다. 컨설턴트들이 보수적인 편이라 큰 기대는 안했는데 반응이 열광적인 거에요. 이후 1년에 2번씩 사내 공연을 펼쳤는데 어느날 ‘아니, 왜 우리가 회사 내에서만 공연을 하고 있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요.”
밴드 리더인 표경원(37) 이사는 이번 공연이 “2주에 한번씩 모여 6개월 동안 밤잠을 줄여가며 준비한 자리”라고 말했다. 바쁘기로 치자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경영 컨설턴트들이 밴드 생활을 5년이나 이어가고 정식 무대까지 마련한 데는 자기 희생이 필수였다.
“평일에는 일과 2, 3시간 가량의 연습을 병행 하느라 수면 시간이 서너 시간에 불과한데다 주말에도 밖에 나가 있으니 가족에게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다”는 표이사는 “초등학교 5학년 딸이 내 얼굴이 나온 포스터를 보고서야 이해해줬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버릇도 생겼다. “시간을 쪼개 써야 하니 짬짬이 시간 나는 대로 연습을 해야 했다”는 이양우(36) 팀장은 클라이언트와의 회의 때 자신도 모르게 발로 테이블 밑에서 박자를 맞추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보컬을 맡은 고준(34) 컨설턴트는 휴대전화 소리를 반주 삼아 노래 연습을 하다 길거리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멤버들은 밴드 활동이 시간을 다투며 사는 일상을 견디는 힘이라고 말한다. 가장 최근 이 회사에 입사한 보컬 라인상(33) 컨설턴트가 “회사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밴드 생활 덕분”이라고 이야기할 정도. 멤버들은 밴드 활동을 통해 적극적인 사회봉사활동의 꿈도 키우고 있다. 표 이사는 “이번 공연 수익금으로 우리 회사가 후원하는 신망애 재활원에 청소기와 세탁기를 사서 보낼 계획이었는데 기대대로 될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30분 남짓 지났을까. 공연 초반 보컬인 고준 컨설턴트가 “여러분, 오페라 극장에 온 것이 아니에요”라며 목청을 높일 정도로 쭈빗하던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어느 새 공연장은 여느 록 콘서트 현장과 다른 것 없는 열정의 도가니로 탈바꿈했다.
라인상 컨설턴트가 여장을 하고 영화 <미녀는 괴로워> 의 삽입곡 ‘마리아’를 부를 때는 10대 소녀팬들 못지않은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2시간 동안 14곡을 소화한 밴드 멤버들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무서웠지만 열정적인 객석의 반응을 보니 기쁘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미녀는>
객석의 평가도 폭발적이었다. 전기순(28ㆍ국립암센터 근무)씨는 “경영 컨설턴트들은 밤을 새워가며 일한다고 들었는데 언제 이렇게 준비를 많이 했는지 놀랍다”면서 “다양한 연령대가 즐길 수 있도록 가요나 팝송을 록 음악으로 바꿔 친근하고 신나는 무대였다”고 평했다.
시종 상기된 표정으로 박수를 쳐대던 박철준(44) 베인앤컴퍼니 대표는 “후배들이 자랑스럽다”면서 “이번 공연이 자선의 의미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회사가 중시하는 창의성 함양에도 도움이 되는 만큼 앞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한 계속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마티브 밴드는 이번 공연을 통해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앞으로 꾸준히 외부 공연을 늘릴 계획이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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