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 지휘자 정명훈(54)은 요즘 직접 만든 지휘봉을 사용한다. 손에 딱 맞는 지휘봉이 없어 아쉬웠던 그는 얼마 전부터 프랑스 집 마당에 있는 올리브 나무로 지휘봉을 만드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일일이 사포로 문질러 완성한 것이 25개쯤 되는데, 가장 잘 만든 것을 서울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셋째 아들 민(23)에게 줬다.
8월 20일 오후 7시30분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열리는 소년의집 기금 마련 음악회에서 정명훈은 자신이 만든 지휘봉을 든 아들의 지휘 아래 소년의집 관현악단과 베토벤 3중협주곡을 협연한다. 피아노 연주에 이어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의 지휘도 한다. 소년의집 관현악단은 마리아 수녀회가 운영하는 부산의 아동복지시설 소속 중ㆍ고교생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다. 운명>
28일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정명훈은 어떤 공연보다 이번 음악회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내가 만든 지휘봉을 경매에 내놓는다든지, 식사에 초대한다든지 아무튼 많은 기금이 모일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이번 음악회는 실력을 넘어서는 뭔가를 전해줄 수 있는 의미있는 공연이 될 겁니다.”
정명훈은 형인 정명근 CMI 대표를 통해 소년의집 관현악단을 알게 됐고, 2005년 11월 도쿄필을 이끌고 내한했을 때 처음 방문해 아이들의 연주를 들었다. 아이들의 열정에 크게 감동한 정명훈은 아들 민이 이 관현악단을 조련토록 했다. “음악에도 순서가 있어요. 맨 먼저 음악과 사랑에 빠지고 다음에 그 깊이와 의미를 찾게 되죠. 성공 여부는 그 다음입니다. 요즘 음악 하는 아이들은 순서가 뒤바뀐 경우가 많아서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먼저 음악 하는 의미를 찾으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곳 아이들에게는 그런 말이 필요 없어요. 음악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이미 갖고 있거든요.”
정명훈은 “학생들이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한다. 서울시향 단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라는 말도 덧붙였다. 소년의집 김소피아 수녀는 “정명훈씨가 찾아오면서부터 아이들의 눈빛과 실력이 완전히 달라졌다. 거장과 함께 공연한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게 영원히 남을 유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아노 연습을 많이 못할 텐데 지휘자 아들에게 혼나는 것 아니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 정명훈은 “다행히 베토벤 3중협주곡이 피아노 파트가 가장 쉽다. 그래서 이 곡을 고른 것”이라며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정명훈의 아들이 지휘대에 선다는 사실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에 대해 그는 “이제 공부를 시작한 단계고, 지휘자가 될 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며 조심스러워 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나 그간의 준비 과정이 지휘에 맞지 않는 건 아니다”는 이중부정으로 은근히 아들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그는 아들이 아홉살 때 자신의 지휘 클래스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을 들은 뒤 음악의 길을 택했고, 더블 베이스와 피아노, 바이올린을 공부했다고 소개했다. “요즘 민이가 소년의집 관현악단과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고 있으니 운명이란 참 대단하죠? 내 아들이라는 사실이 부담이 될까봐 아이들이 음악을 하지 않길 바랬어요. 하지만 어디 부모 뜻대로 되겠습니까. 하하.” 운명>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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