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영화 <하나 그리고 둘> 을 보면, 과거 첫사랑 여자를 만나 하룻밤 불륜에 고민하는 아버지와 남자친구와 첫 데이트를 하면서 첫날밤을 치를지를 고민하는 딸의 모습이 교차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자친구가 손을 맞잡고 과거 연애시절을 떨리는 목소리로 회상할 때, 딸과 딸의 남자친구는 아버지의 회상을 현재 진행형으로 체험한다. 하나>
교차편집이라는 간단한 영화적 장치를 통해, 에드워드 양 감독은 가족의 성장통과 발달과업은 세대를 통해 되풀이 되며, 나만 경험하는 것 같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사실은 가족 안에서조차 새로울 것이 없다는 통찰을 한번의 붓질로 완성해 낸 것이다.
영화 <준벅> (28일 개봉)에서도 가족에 대한 감독의 비슷한 통찰은 단연 빛이 난다. 영화의 내용인 즉은 도회에 나가 성공한 큰 아들이 시카고에 화랑을 갖고 있는 아름다운 연상의 신부를 데려오면서 원가족들과 좌충우돌을 벌인다. 준벅>
그런데 스크류 드라이버를 찾아내는 며느리를 바라보는 시아버지의 시선은 늘씬한 며느리의 다리에 꽂혀 있고, 임신한 동서는 남편 몰래 혼자서 자위를 하고, 시동생은 형수가 사랑한다고 안아주자 그녀의 엉덩이에 손이 간다.
한 순박한 남부 가족의 내면에 깃든 폭발할듯한 긴장감,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이 가족을 가면 갈수록 서로에 대한 오해와 역기능의 코너로 몰아 붙인다.
필 모리슨은 도시 며느리와 시골 가족간의 좌충우돌의 문화적 갈등을 통해, 가족의 문제는 같이 살지않는 한 이해되지 않는 것이며, 가족의 문제는 계속되는 동심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심력이란 깡통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실 <좋지 아니한가> 부터 시작하여 <보통 사람들> 에 이르기까지 가족의 문제를 다루는 감독들은 비밀과 거짓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가족문제를 동심원적 반복 안에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좋지>
해결 역시 '따로 또 같이' 의 해법을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가족영화에서 가족을 다루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의 방법. <준벅> 에서 필 모리슨 감독은 가족 내부를 조망하기 위해 에드워드 양과 달리 '소리'를 선택한다. 준벅>
종종 격렬한 가족의 말다툼 끝에 카메라가 택한 것은 텅 빈 집과 방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비어 있는 풍광들이다. 밤만 되면, 이 집만은 벽에도 귀가 있는지 숨겨진 한숨소리, 다투는 소리, 신혼부부의 격렬한 섹스 후의 신음소리가 서로의 귀에 모두 들린다. 그곳 6월의 햇볕은 너무 길고, 시카고에서 한 가족에 이르는 길은 너무 먼 것이다.
완벽한 사랑도 완벽한 미움도 존재하지 않는 가족의 초상. 그러고 보니 그 중 가장 근사해보였던 큰 아들 조지 역시 신혼의 아내가 언젠가 내 단점을 알게 되면 실망하게 되리라고 걱정하지 않는가. 조지의 이 대사가 마음에 꽂히는 지점이 있다면, 당신은 <준벅> 의 가족들을 그저 나의 가족들처럼 그대로 맞아 들일 수 있는 준비가 이미 되었을 것이다. 준벅>
영화평론가ㆍ대구사이버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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