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들어 온 외국인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이 이 왕국의 법도다. 국왕이 너희를 돌볼 것이다. 너희는 이 땅에서 일생을 마쳐야 한다.”
푸른 눈의 선원들은 조선 국왕의 엄명에 어린 아이처럼 느껴 울었다. 장편 소설 <천년의 왕국> (문학과 지성사)은 380년 전, 꿈에도 생각 못한 조선 땅에 불시착해 푸른 눈의 이방인으로 살다 간 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의 이야기다. 천년의>
작가 김경욱(36)은 19일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갖고 “조선에서 세계의 시선으로 살았던 현대적 인간을 그리고 싶었다”며 네 번째 장편을 세상에 부려 놓는 소회를 밝혔다. <장국영이 죽었다> 이후 2년만의 작품이다. 장국영이>
계간 <문학과 사회> 2006년 여름호에서 지난 봄호까지 연재됐던 이 작품은 역사 소설의 형태를 빌어, 역사가 누락한 이방인들의 시간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온존시키고자 한다. 박연(朴燕)이라는 이름을 얻어 조선에 뿌리 내리기까지의 10년 세월을, 1인칭 시점으로 생생히 복원해 낸다. 문학과>
“<하멜 표류기> 를 보고 눈이 번쩍 했어요.” 1653년 여름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베르호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 해안에 좌초돼, 선원 64명중 36명만 살았다는 기사였다. 생존자 중에는 후일 조선을 탈출한 후 13년 동안의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한 하멜도 있었다. 하멜>
소설은 조선 이름을 얻고 식솔까지 거느린 벨테브레가 본래의 자아와 낯선 땅에서 내면의 전투를 계속한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를 알고 나서는 소설로 쓰지 않을 수 없었죠. 1인칭 시점을 택해 감정이입을 하려 노력했어요. 완전히 조선 사람의 심성을 갖게 된 그는 말하자면 380년 전에 조선에서 세계의 시선으로 살았던, ‘현대적 인간’인 셈이죠.”
그를 위해 작가는 과거를 탐사했고, 그 흔적은 책의 말미에 남겨져 있다. <하멜표류기> <10일간의 조선 항해기> 등 11권의 참고 서적은 기록된 역사가 놓쳐버린 이방인의 시간에 피와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필요한 양식이었다. “자료의 미흡함은 없었어요.” 하멜표류기>
사실에 근거한 작가의 상상력은 조선을 완전한 이방인의 나라로 재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신ㆍ구교 간의 갈등이 극심했을 뿐더러, 동양에 대한 터무니 없는 낭만적 상상으로 가득했던 서양이 ‘코레시안’에 대해 갖고 있음직했던 억측이 소설에서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작가는 “5년 전 서양의 중세를 배경으로 썼던 장편 <황금사과> 에서 얻은 경험이 이번 소설을 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밝혔다. 1998년 벨테브레의 13대손이 한국에 찾아온 일도 역사적 개연성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였다. 황금사과>
일견 제국주의적 의미로도 비칠 수 있는 일이다. “제국주의보다는 세계사적 관점을 중시하고 싶어요.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 시민 정신의 보루ㆍ첨병이었어요. 동인도회사를 보세요.” 그 요체였던 장사꾼 기질, 실용주의, 모험 정신을 작품에서 읽을 수 있기를 그는 희망했다. “소설에 나오는, ‘두려움 없이 살아라’는 말을 새겨주세요.”
작품을 위해 낮 시간에, 매일 20~30매씩 썼다. “감상적으로 될까 봐, 밤에는 안 썼죠.”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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