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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5> 부다페스트-다뉴브강의 잔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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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15> 부다페스트-다뉴브강의 잔물결

입력
2007.06.20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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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잔나 R.는 부다페스트에 본사를 둔 <마자르 라디오> 기자였다. 눈동자는 쪽빛이었고 머리카락은 볏짚을 연상시켰다. 나보다 조금 컸으니 키가 180㎝에 가까웠을 게다.

독일어를 제 모국어만큼 빠르게 내뱉을 줄 알았다. 영어로 말할 땐 속도가 좀 줄었다. 프랑스어로 말할 땐 할머니들처럼 음절을 또박또박 끊으며, 몸짓을 섞어가며, 느릿느릿 낱말을 이어갔다. 세 외국어 가운데서 프랑스어가 그녀에게 가장 덜 익숙하다는 뜻이었을 게다.

그래도 주잔나는 프랑스어로 말하길 즐겼다. 친구들이 그녀에게 영어로 말을 건네도, 그녀는 프랑스어로 대답하기 일쑤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여긴 파리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가 서울에 오지 않는 건 한국어를 아직 익히지 못해서 일까?

“서울 정말 예쁘더라.” 수인사를 나누고 사나흘쯤 뒤 퐁피두센터 근처의 카페 보부르에서 그녀가 염소치즈샐러드를 입에 우물거리며 말했다. 1988년 올림픽 때 헝가리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본 서울 풍경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 강 있잖아. 서울을 흐르는 강.” 내가 ‘한강’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래, 그 한강 둘레 풍경. 환상적이더라구!”

그것은 자신이 처음 사귄 한국인 친구에게 기쁨을 주려고 주잔나가 부러 실천한 입발림이었을 수도 있다. (“환상적이군! Fantastique!”은, “굉장하군! Super!”와 함께, 주잔나가 늘상 애용하는 간투사였다.) 그게 아니면 정말 헝가리 텔레비전에 비친 한강 주변 풍경이 아름다웠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카메라맨의 재주가 정녕 놀랍다. 도대체 어떤 마술로 한강 주변의 삭막한 풍경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그 자리에서, 육안으로 보는 한강 둘레 풍경은 끔찍하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바로 한강변에서 자랐으니 이 말은 믿어도 된다고 첨언했다. 나는 처음에 한강 둘레 풍경이 ‘테리블(terrible)’하다고 말했다가 곧 ‘오리블(horrible)’로 바꾸었다.

둘 다 ‘무시무시하다’는 뜻의 프랑스어지만, ‘테리블’은 맥락에 따라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를 담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제 말에 맞장구치는 것으로 주잔나가 오해할까봐 얼른 ‘오리블’을 덧붙인 것이다.

주잔나에게 답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 부다페스트가 훨씬 더 예쁠 거야.” 확신을 지니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 때까지 나는 육안으로는커녕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통해서도 주잔나의 고향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유럽인들이 부다페스트를 두고 ‘동방의 파리’니 ‘다뉴브의 진주’니 하는 말을 흘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 영 자신 없이 한 말은 아니다.

적어도 부다페스트가 서울보다 미울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몇 달 뒤 부다페스트에 다녀온 나는 주잔나에게 확신을 지니고 알려주었다. “부다페스트가 서울보다 예뻐. 다뉴브강 주변이 한강 주변보다 훨씬 더 예뻐.”

부다페스트는 확실히 서울보다 볼만했다. 하기야 유럽에 서울만 못한 수도가 어디 있으랴. 서울에선 도대체 과거를 읽을 수 없지 않은가. 역사를 지워버린 600년 고도가 서울이다.

부다페스트에선 적어도 과거와 현재가 함께 숨쉬고 있었다. 헝가리 건국 신화와 연결된 ‘어부의 요새’는 그 역사의 가장 오랜 지층이다. 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다뉴브의 진주’라는 찬사는 다소 과장된 것 아닌가 싶다.

빈이나 베오그라드 같은, 다뉴브 연안의 다른 도시들도 내 눈엔 부다페스트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만해도 어딘가. 육안으로 보기 전에 내가 부다페스트에 대해 지닌 이미지는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이나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쓰러진 열세 살 소녀’ 따위였다.

고등학생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이라는 시 때문이었다.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세 해 뒤 찾은 부다페스트에는 그런 비극적 드라마 흔적이 없었다.

김춘수의 시도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로 시작하거니와, 내가 유럽에서 처음 다뉴브를 본 것이 부다페스트에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유럽에서 처음 본, 강다운 강이었다. 한강변에서 자라 강이라면 한강 정도 너비는 지니려니 여겼던 내게, 파리의 센강은 개천이나 한가지였다. 그런데 부다페스트의 다뉴브는, 서울의 한강만큼 넓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강다웠다.

나는 지난주 베오그라드 얘기를 하면서 이 강을 ‘도나우’라 불렀다. 그것을 지금 ‘다뉴브’라 부르는 것은, 도나우라는 독일어 이름보다 다뉴브라는 영어 이름이 차라리 더 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다뉴브는 유럽에서 볼가강에 이어 둘째로 긴 강이고, 우리가 흔히 진짜 유럽이라 여기는 러시아 서쪽에선 가장 긴 강이다.

독일 남부 슈摸C蕩尙?【?발원하는 브리가흐강과 브레크강은 인근의 도나우에싱엔이라는 곳에서 합류한 뒤 흑해를 향해 기다란 여정을 시작하는데, 도나우에싱엔 이후의 물줄기를 다뉴브라 부른다.

그 본류만 해도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열 나라를 흐르고, 그 지류까지 합하면 이탈리아 스위스 체코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폴란드 등 거의 그 만큼 수의 나라를 더 지난다. 독일 이동(以東)의 유럽 나라 거의 전부를 다뉴브가 적시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강을 부르는 이름도 많다. 영어 이름 다뉴브말고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독일어 이름 ‘도나우’지만, 베오그라드에서 쓰는 세르비아어로는 ‘두나브’고, 부다페스트에서 쓰는 헝가리어로는 ‘두너’다. 제 영토 안에 다뉴브의 흐름을 안은 다른 많은 나라들도 이 강을 제가끔 서로 달리 부른다.

한국인들에게 이 강 이름이 익숙해진 것은 <다뉴브강의 잔물결> 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왈츠곡 덕분일 텐데, 그 선율을 만든 요시프 이바노비치는 루마니아 사람이다. 그의 모국어로 다뉴브는 ‘두너레’에 가깝다. 그 이름들은 모두 ‘흐름’이나 ‘강’을 뜻하는 고대 이란어 ‘다누’에서 왔다 한다.

이 강의 구획에 따라 해당 지역 언어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공정하겠지만, 그것은 필자나 독자 모두에게 번거로운 일일 테다. 그래서 차라리 한국인에게 익숙한, 그리고 이 강 유역 사람들 모두에게 공정히 이질적인 영어 이름 ‘다뉴브’를 사용하려 한다.

부다페스트는 다뉴브를 사이에 두고 각기 발달한 부다와 페스트가 1873년 한 행정구역으로 묶여 태어난 쌍둥이 도시다. 정확히 말하자면, 좌안(동쪽)의 페스트와 우안(서쪽)의 부다 그리고 오부다(‘옛 부다’라는 뜻이라 한다)가 한 도시로 묶였으니 세쌍둥이 도시라 할 수 있다. 왕궁과 요새 등 헝가리 역사의 영욕을 상징하는 건조물들은 부다에 있지만, 비즈니스와 문화활동으로 붐비는 페스트 쪽이 더 번화하다.

나는 부다페스트엘 두 번 가봤다. 첫 번째는 방문이랄 것도 없었다. 자그레브에서 버스를 수없이 갈아타고 도착한 이 도시에서 하룻밤을 잔 뒤 이튿날 베오그라드행 열차를 탔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문 땐 닷새를 머물며 도시를 음미했다. 호텔이 부다의 모스크바 광장 부근에 있었는데, 치얼로가니 거리를 내달아 다뉴브에 다다른 뒤 강을 따라 세체니 란츠히드 다리 쪽으로 걸으며 강 건너편의 페스트와 이편의 부다 풍경을 살피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저절로 <다뉴브강의 잔물결> 이 흥얼거려졌다. 입구를 사자 상(像)으로 장식한 세체니 란츠히드 다리는 파리 센강의 알렉산드르3세 다리를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다. 그 다리 한 가운데 서서 북쪽의 하중도(河中島) 마르기트 섬을 보고 있노라면, 아닌게아니라 파리 느낌이 설핏 든다. ‘동방의 파리’라는 별명을 납득할 것도 같다.

부다페스트 거리를 걸을 때 특히 이방인 의식이 드는 것은 그 이정표들이 주는 아득함 때문이다. 물론 동유럽의 슬라브어권 도시들도 크게 다르진 않으나, 그래도 그 도시들의 이정표에서는 어렴풋하게라도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말들이 더러 발견된다. 그러나 부다페스트에선 어림없다.

그 거리의 이정표에 적혀있는 말들은 딴 유럽어들과 너무 다르다. 16세기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헝가리 역사는 오스트리아 역사와 적어도 그 상층부에서는 한몸을 이룰 때가 많았지만, 부다페스트의 도로표지판에서 이방인이 발견할 수 있는 독일어의 흔적은 도무지 없었다.

헝가리어는, 그 말을 쓰는 마자르족이 그렇듯, 인도유럽어 지역에서 드문드문 발견되는 언어적 섬이다. 마자르족은 그 원향(源鄕)이 중앙아시아 어디라 한다. 한국인들도 제 조상이 수천 년 전 중앙아시아 어디에서 왔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헝가리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는 한국에 가까운 나라인지도 모른다.

부다페스트나 그 부근에서 태어나 이 도시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20세기 지식인들 몇은 한국인들 귀에도 익숙하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미학에서 정치사상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 웅장하고 아름다운 지적 건조물을 세운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지외르지 루카치(헝가리인들은 동아시아인들처럼 성을 앞세우니 루카치 지외르지가 돼야겠지만)일 것이다.

루카치는, 비록 제 지적 작업을 헝가리어로보다는 독일어로 훨씬 더 많이 수행했지만,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이 도시에서 살다 이 도시에서 죽은 진짜 부다페스트 사람이었다.

지식사회학의 개척자 카를 만하임과,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 라는 책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예술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도 빠뜨릴 수 없다. 만하임은 학자로서의 삶 대부분을 독일과 영국에서 살았지만,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자랐고 부다페스트대학에서 지적 항해를 시작했다.

하우저 역시 장년기 이후를 망명 생활로 채웠지만 예술사 공부를 시작한 것은 부다페스트대학에서였다. 루카치와 만하임, 하우저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부다페스트에서 활동을 펼친 청년지식인 그룹 ‘일요서클’의 동료들이기도 했다.

몇 년 전 롤프 슈벨 감독의 영화 <글루미 선데이> 를 봤다. 1933년 부다페스트의 한 아마추어 작곡가 손에서 태어나 전세계 수십 명의 젊은이들을 자살로 내몰았다는 동명의 노래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당연히, 배경이 부다페스트였다. 스크린 속의 부다페스트는 내가 실제로 본 부다페스트보다 한결 예뻤다. 그게 카메라의 힘이겠지. 주잔나가 서울을 예쁘다 여겼던 것이 이해된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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