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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2> 베이징 하늘에 태극기 날리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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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대사의 한중수교 비망록] <2> 베이징 하늘에 태극기 날리고(하)

입력
2007.06.20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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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흐르면 도랑이 생긴다(水到渠成ㆍ수도거성).’

1992년 4월13일 이상옥 외무장관이 중국 요인들의 집무실이 있는 중난하이(中南海)로 리펑(李鵬)총리를 예방한 자리에서 리 총리가 양국의 미래를 이 같은 고사성어로 전망했다.

이 장관은 14일부터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유엔 아시아태평양지역경제사회위원회(ESCAP) 제48차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 외무장관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 중이었다. 물론 자격은 ESCAP 47차 총회 의장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반 뒤인 8월24일 오후 3시. 이 장관을 비롯한 우리 대표단은 중난하이로 리펑 총리를 예방했다. 이번에는 이 장관이 ‘수도거성’을 언급하며 “두 나라 사이에 물이 줄기차게 흘러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역사적 문서에 서명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이어 인민대회당으로 양상쿤(楊尙昆) 주석을 예방했다. 국가 주석은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 국가기관이라 이 면담은 양국의 국교가 열렸다는 것을 상징하였다. 양 주석은 노태우 대통령을 공식 초청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수도거성’의 의미를 달리 해석해 보았다. 리펑 총리는 양국의 밝은 미래를 염원하며 던진 말이겠지만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수도거성’은 채근담에 나오는 고사성어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낙숫물이 댓돌 뚫는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전날 중국 측이 양국의 수교를 기념하기 위해 수교 공동 서명식이 열리는 팡페이위안(芳菲苑) 앞 정원에 우리 국화인 무궁화 한 그루를 심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중국 측의 용의주도한 배려속에 양국의 미래가 아주 낙관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리라고 예감했다. 4~5년 생으로 보이는 무궁화에는 때마침 연한 자주색의 꽃이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일제가 국권을 강점한 1910년 이래 양국 정부간 공식관계가 끊어진 80여년은 양국의 국민에게 엄청난 불편과 부담을 준 시련의 세월이었다. 미수교국이란 인위적인 장애물은 만리장성처럼 높고도 두터웠으며 이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양국 국민은 비공식 민간교류를 ‘흐르는 물’처럼 꾸준히 지속적으로 증가시켜 왔다.

양 국민간 비공식 민간교류야 말로 바로 ‘흐르는 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흐르는 물’이 ‘도랑물’이 되고 도랑물이 합쳐서 강물이 되어 양국 정부간 미수교국 관계라는 거대한 뚝 같은 인위적 장애물을 무너뜨리고 한중 수교의 물꼬를 튼 원동력이 되었다. 당연히 한중 수교의 주역은 바로 한국 국민과 중국 인민이라고 나는 믿는다.

미수교국 관계라는 인위적인 장벽이 무너지면서 지난 15년간 한국 국민과 중국 인민이 주도하는 교류는 모든 분야에서, 마치 거대한 댐의 둑이 터지듯이 폭발적으로 증가, 장강처럼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실제로 수교 당시 한국의 대중국 수출은 27억 달러에서 지난해 695억 달러, 수입은 39억 달러에서 486억 달러로 급증했다. 무역 기준으로 20배 가까운 성장을 이룬 것이다. 인적 교류 또한 그에 못지않다. 수교 이듬해 중국을 찾은 한국인은 약 11만,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은 약 10만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각각 147만과 90만명으로 10배 안팎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양국 국민의 불편함이 흐르지 못하고 얼마나 고여 있었는지- 이 거대한 댐의 둑을 무너뜨린 국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그리고 그 국민의 힘이야 말로 수교의 원동력이었음을 자명하게 입증하고 있지 않는가.

권병현(한중문화청소년협회회장ㆍ전 주중국 한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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