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지난 주 언론을 ‘떼지어 사냥하는 야수’라고 비판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당장 영국 언론이 떠들썩하게 논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언론이 ‘블레어도 언론과 전쟁’이라며, 노무현 대통령과의 갈등을 새삼 부각시키는 기회로 삼은 것은 어색하다.
두 사람 다 정책 실패나 과오의 책임을 회피한 채 적대적 언론을 탓한다고 흉보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듯 단순하게 소개할 일은 아닐 듯 하다.
● 블레어, 언론과 정치 ‘선의’ 강조
블레어는 이 달 말 퇴임을 앞두고 10년 간의 국정 경험을 회고하는 시리즈 강연을 하고 있다. 지난 주는 로이터언론연구소에서 언론과 정치의 관계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첫머리에 미디어 환경의 급변에 따라 언론과 정치가 직면한 도전을 헤쳐나갈 비전을 넓은 안목으로 함께 성찰할 것을 당부했다.
이어 가혹한 언론 보도도 총리 자리의 엄청난 특권에 따르는 작은 대가일 뿐이라고 거듭 지론을 밝힌 것을 상기시켰다. 그런 만큼 본질적으로 나라를 위하는 선의를 지닌 정치와 언론의 상호 적대에 누구를 탓할 뜻은 없으며, 누구 잘못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언론이 지나친 적대적 보도로 정치 불신과 혐오를 부추기는 근본은 기술발전에 따른 미디어 경계 붕괴와 24시간 뉴스경쟁 등 언론환경 변화에 있다고 전제했다. 이에 따라 언론은 관심을 끌기 위해 객관적 사실보도보다 충격(impact) 효과가 큰 보도에 매달리는 것으로 진단했다.
단순한 흥미 유발을 넘어 분노와 쇼크를 촉발하는 스캔들과 논쟁에 집착하고, 정책 잘못이나 실수를 흔히 악의적 음모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언론이 낙종을 겁내 무리 지어 사냥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면서, 공인의 평판을 갈가리 찢는 행태는 야수와 다름없다고 규정했다. 이어 센세이셔널한 뉴스도 사실보도보다 논평에 힘을 쏟는 관행을 지적했다. 또 정치인들은 엉뚱한 해석을 반박하느라 기력을 소모하기 일쑤라고 개탄했다.
이 대목에서 블레어는 이라크 침공 등 중동정책에 특히 비판적인 중도좌파 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거명, “신문(新聞:newspaper)이 아니라 견문(見聞:viewspaper)”이라고 비꼬았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는 그릇된 저널리즘의 전형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성찰’에 상당부분 공감하는 이들도 이 대목은 블레어가 스스로 앞세운 진정성과 논리를 지키지 못하고 쌓인 감정을 표출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인디펜던트는 “최악의 외교정책 실패를 비판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격앙된 어조로 반박했다. 또 블레어가 노동당수가 된 뒤 “호랑이에 물려죽기보다 등에 올라타야 한다”고 선언, 오랫동안 적대적 보도로 집권을 방해한 보수언론에 유화적 태도를 보인 것을 상기시켰다.
언론 본연의 비판에 충실한 인디펜던트를 나무라는 것은 위선이라는 지적이다. 타블로이드 언론도 “퇴장할 문고리를 잡고 욕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고 비꼬았다.
● “국가적 상처 치유에 공동책임”
그러나 권위 언론의 반응은 상당히 다르다. 보수신문 더 타임스는 블레어는 언론의 희생자가 아니라며, 노동당이 정책변화로 유권자의 신뢰를 얻어 집권한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이와 함께 언론도 객관성과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고 짐짓 점잖게 충고했다.
좌파 신문 가디언은 블레어 정부가 공격적 언론정책으로 스스로 야수를 키웠다고 비판하면서도, 언론과 정치 관계의 왜곡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은 인정했다. 인디펜던트지도 언론과 정치의 신뢰 붕괴를 바로 잡을 책임은 양쪽 모두에 있다는데 동의했다.
이런 논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언론과 정치의 적대가 사회 전체를 추락시킨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점이다. 특히 자신은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흑백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함께 국민의 신뢰 회복을 고민하는 모습은 우리 현실과 아주 다르다.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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