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조건이 필요할까. 그것도 계급 구별이 엄격했던 프랑스 귀족사회 안에서라면. 18세기 프랑스의 대표 희극 작가 피에르 드 마리보가 <사랑과 우연의 장난> (연출 임영웅)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사랑과>
연극의 막이 오르자 귀족 처녀 실비아가 하인 리제트에게 온갖 불평을 쏟아낸다. 아버지가 주선하는 결혼이 미덥지 않아 리제트에게 불평하는 것이다.
남자들의 허식, 이중성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두려워하는 실비아는 자신과 리제트의 역할을 바꾸고 상대의 진심을 확인하기로 한다. 상대가 하녀 복장을 한 자신의 진가를 알아차릴 수 있는지 시험하고 결혼을 결정하겠다는 요량이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결혼 상대인 도랑트 역시 실비아를 관찰할 속셈으로 하인인 아를르캥과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난다. 도랑트와 실비아 그리고 아를르캥과 리제트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자신들을 시험대에 내몰고 만다.
모든 상황을 아는 인물은 실비아의 아버지 오르공과 오빠 마리오. 둘이 짓궂은 장난으로 갈등을 조장하면서 네 남녀의 심리는 더욱 얽힌다.
오르공과 마리오가 극에서 이런 상황을 즐긴다면, 이를 보는 관객은 도랑트와 실비아가 꾀를 부리다 거기에 자신들이 걸려드는 모습을 통해 극적 재미를 만끽한다.
무엇보다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마리보다주’로 불리는 작가 마리보 특유의 대사다. 대사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고 다 드러내는 것을 표현하는 이 말은 등장 인물이 겪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데 사용된다.
계급이라는 장애 앞에서 주저하는 인물들이 내뱉는 “정말 괴롭구나”(도랑트) “답답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실비아)와 같은 방백도 폭소를 자아낸다.
그렇다면 관객의 박장대소를 이끌기만 하면 희극이 그 임무를 완수한 것일까. 공연장의 웃음이 주었던 청량감이 공연장 밖에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인물의 심리와 연극의 상황이 주는 웃음에 감응했지만 연극을 곱씹게 하는 날카로운 풍자는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사랑에는 결국 조건이 필요 없더라’는 원작의 주제를 무대에 고스란히 구현하는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이 시대에 이 작품이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해 보인다.
21세기 한국이 18세기 프랑스와 같은 귀족사회가 아닌 이상 귀족은 귀족끼리, 하인은 하인끼리 짝을 찾는 ‘유유상종’식의 결말이 왠지 모를 씁쓸함을 가져다 준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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