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물만큼 세상의 역사에 중요한 기여를 한 동물이 있을까 싶다.”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별세 1년 전인 1881년에 마지막으로 쓴 연구서 <벌레들의 행동을 통한 식물성 부식토의 형성> 에서 이렇게 극찬한 동물의 이름은 무엇일까? 벌레들의>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그리고 정답을 듣고 실망하지 마시라. 잠시만 따져보면 그럴 법도 하니까.
정답은 지렁이다. 다윈 이전에도 토양에서 지렁이가 하는 기능에 주목한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다만 19세기 말 분석적 과학의 시선으로 지렁이의 행태와 기능을 정밀하게 밝힌 것은 다윈이 처음이다.
■ 다윈이 만년에 주목한 지렁이 덕을 가장 많이 본 나라는 쿠바가 아닐까 싶다. 1991년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쿠바는 석유와 공산품, 식량을 싸게 수입할 수 있는 우호국을 모두 잃어버렸다. 기름 부족으로 자동차와 농기계가 멈춰 섰다. 곧바로 농사에 타격이 갔다.
초기 몇 년 동안은 영양실조가 심해져 5만여 명이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돌파구로 삼은 것이 유기농이었다. 비료를 수입할 수도 없고, 농기계를 사용한 대규모 경작도 불가능한 만큼 어쩔 수 없이 전통적인 농사법으로 돌아간 것이다.
■ 이때 큰 몫을 한 것이 지렁이다. 쿠바는 세계 각국에서 지렁이를 들여와 토양을 가장 기름지게 하는 종을 찾아냈다. 이 지렁이를 대량 사육해 녀석들이 유기물을 먹고 배출하는 분변토(糞便土)를 비닐팩에 포장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순수 천연 비료인 셈이다. 성과는 놀라웠다.
그 결과 쿠바는 지금 완벽한 식량 자급을 이루고 있다. 미국의 수출입 금지 조치가 수십 년간 지속되고 있는 고립국가로서 놀라운 성취이다. 앞으로 지구의 농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녹색혁명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 한국에서도 얼마 전부터 지렁이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지렁이 분변토가 거름으로 좋다는 사실도 알려졌고, 토룡탕이 정력에 좋다는 잘못된 인식도 있었고, 지렁이를 활용해 처리가 곤란한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방법도 개발됐다.
지난 13일자 한국일보에 경북 청도초등학교 6학년 이수인양이 지렁이를 키워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자는 제안을 했다. 화분에 지렁이를 담고 음식물 찌꺼기를 조금씩 넣어주면 며칠 만에 잘 분해해서 기름진 흙으로 바꿔준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러나 지렁이란 녀석이 썩 정이 안 가서, 또는 귀찮다는 이유로 적극 실천하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 집부터 한 번 해 보아야겠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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