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에 부는 중국 현상, 그 바람의 냄새를 맡으러 왔습니다.” 기자는 카자흐 최대 도시 알마티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이 말부터 꺼냈다. 이에 현지 기업인, 한인동포, 언론인 등은 도무지 감 잡히지 않는 저마다의 대답을 들려줬다.
“여기는 우루무치(중국) 생활권이에요. 중앙아시아 전체가 그래요.” “독립(1991년) 당시 중국이 우리를 먹여 살렸죠. 지금은 오히려 의존도가 덜해요. 중국 상품이요? 이제 ‘싸구려’ 소릴 듣습니다.”
“중국인을 무시하는 풍조가 있지만 거기엔 경계심이 깔려 있어요. 중국 힘이 확장되니 겁이 나는 겁니다.” “중국의 에너지 사냥을 보면 그들이 카자흐를 더 원하는 듯 해요. 카자흐는 이런 중국을 러시아 견제용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강하고요.”
어쩌면 체감도가 이처럼 다를까. 카자흐인 삶 깊숙이 중국이 파고든 반증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국경도시 하르고스로 향했다.
중앙아시아를 달려온 험준한 텐샨산맥이 살짝 길을 내준 실크로드 텐샨북로의 경유지. 곳곳의 군대 막사는 이곳이 냉전시대 자유진영에 데탕트를 열어준 중국이 구 소련과 대치했던 현장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21세기 실크로드 거점은 동ㆍ서 물품의 교역로가 아닌 ‘메이드 인 차이나’의 일방 통행로였다.
지난 2일 아침 9시 국경이 열리자 2차선 길에 중국제품을 가득 쌓은 트럭 행렬이 시작됐다. 그 뒤로 중국에서 제작된 2억원대 중장비 50대가 카스피해 유전도시 아티라우를 향해 달리고, 시보레의 ‘Levo’를 본딴 짝퉁 차 ‘Lova’ 수십대도 줄지어 국경을 넘어왔다.
맞은편 길에선 카자흐 보따리상을 태운 중국행 버스와 승용차들이 질주했다. 국경 초소 옆 빈터에는 중국비자가 있어야 탈 수 있는 월경 총알택시 20여대가 대기했다.
하르고스는 마치 역류하는 황하의 현장처럼 보였다. 2013년 이곳에 10억달러가 투자되는 10㎢ 크기의 카자흐-중국 자유무역지대와 새 육상통로가 완공된다. 이 중국의 서진(西進) 포석은 중앙아를 넘어 중동과 유럽권까지 겨냥하고 있다.
카자흐 보따리상이 달려가는 곳은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관문도시 우루무치. 중앙아에서 쇼핑 천국으로 묘사되는 우루무치는 러시아 접경 유전도시 악토베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쇼핑을 가는 곳이다.
10여년 전까지 빈촌이던 우루무치는 빌딩과 까르푸 KFC 등이 들어선 대도시로 탈바꿈해 있다.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서북경제 나아가 중앙아 경제권을 형성하려는 중국이 서북공정에 나선 이후 현상이다.
이틀 뒤 4일 아침 6시 카자흐스탄 알마티 중심에 있는 제2역. 우루무치에서 36시간 ‘철의 실크로드’를 달려온 ‘쾌속열차’가 들어섰다. 중국의 오성기 마크를 단 객차 11량이 멈춰 서자 제복 입은 중국 승무원 뒤로 가방과 보따리들이 쏟아져 내렸다.
플랫폼은 금새 자동차 부품, 이불, 방한복, 바나나, 맥주, 사과, 생선 등으로 채워졌다. 양국 교역규모 80억달러는 ‘파악된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 나 보였다. 1만5,000달러 어치 쇼핑을 했다는 발렌티나(49ㆍ여)는 나이키 운동화를 들어보이며 ‘기타에 호로쇼(중국이 좋다)’라는 중국 인상기를 전했다.
중앙아를 파고드는 ‘메이드 인 차이나’의 모습은 알마티 도심외곽 바라홀카 도매시장에서 목격된다. 서울의 남대문ㆍ동대문 시장을 합친 것보다도 큰 시장은 중국산 음식료, 의류 전자제품 등이 90% 가까이 차지한다.
컨테이너 수만개를 이층으로 붙여 쌓은 시장은 주변국 보따리상까지 몰려 중국상품의 중앙아 중개시장이 돼 있다. 이곳 중국인 전문상가 야리안(亞聯)에서 7년째 옷을 파는 중국인 리아(43ㆍ여)는 “세계에서 중국 물건 안 파는 곳이 있느냐”며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그는 “초기 10명이 하던 것을 1,000명이 해 벌이가 시원찮다”고 말했다. 중국인과 중국상품의 유입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 하는 말이었다.
하르고스ㆍ알마티(카자흐스탄)=이태규기자 tglee@hk.co.kr
■ 카자흐 이중적 對中감정… 속으론 "황하의 역류에 휩쓸릴라"
중국제품의 중앙아시아 장악은 1990년대 급속히 진행됐다. 91년 독립한 카자흐는 당시 생필품을 거의 중국에서 가져왔다. 최근 오일머니가 유입되면서 상황은 조금 바뀌고 있다.
가격보다는 품질을 중시하는 중산층과 고소득층은 한국이나 터키제품, 또는 유럽이나 미국의 명품을 찾는다. 신흥부자 '노보이 카작'들은 벤츠, 도요타, 아우디를 몰고 젊은 여성들은 배꼽티에 청바지를 입는다. 알마티의 사람이나 건물, 거리는 서구의 한 도시를 연상케 했다.
이런 카자흐의 중국, 중국인, 중국상품에 대한 감정은 이중적이다. 중국제품은 실생활에 필요하지만 '싸구려'나 '믿을 수 없다'며 무시한다.
교통경찰 단속을 무마하는데도 중국인은 무마비용이 카자흐인보다 10배 많은 5,000텡게(45달러)가 든다.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9,100달러(2006년 추정치)로 중국의 7,600달러보다 많아 자부심은 높아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확대되는 중국의 힘에 휩쓸릴까 걱정한다. 러시아에서 독립해 홀로서기도 전에 중국의 영향권에 놓일까 하는 우려다.
이런 견제 탓인지 3년 전에는 알마티에서 중국인들이 불법체류자로 대거 단속돼 송환됐다. 지금도 단속이 수시로 이뤄져 한족(漢族)처럼 보이는 중국인을 거리에서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근 카자흐인들의 자부심은 '자원의 힘'을 빌린 것일 뿐이어서 속이 허하다"고 KOTRA 알마티 무역관 박성호 관장은 평했다.
중국 경계심의 배경에는 역사적 경험, 지정학적 조건 등 카자흐의 한계가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18세기 중반 청의 진출을 두려워 한 일부 카자흐 지역 세력들은 러시아제국에 자진 복속됐다. 러시아 지배를 받았지만 독립국가연합(CIS) 가운데 독립선언이 가장 늦을 만큼 친 러시아 성향이 강하다.
더구나 국토가 세계 9번째로 크면서도 인구는 1,600만명에 불과한 카자흐의 인구ㆍ영토 조건은 제조업 육성에 치명적이다. 시장이 형성되기 어렵고 물류비용도 엄청나게 든다.
카자흐 정부는 제조업 육성책인 '2030프로젝트'을 외쳤지만 아직 자체 브랜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때문에 하르고스의 국경이 일시 폐쇄되면 물가가 앙등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열리곤 한다. 센트럴아시아마케팅(CAM)의 김상욱 대표는 "요즘 카자흐에선 두바이와 같은 금융허브 육성론이 더 자주 언급된다"고 카자흐가 국가전략을 수정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알마티=이태규기자
■카자흐서 두마리 토끼 잡는 中
중앙아시아는 중국의 최대 현안인 에너지 확보와 소수민족인 위구르족 문제 해결의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경제의 서진(西進)으로 문제가 풀리고 있는 것이다.
위구르족은 중국 서북부인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공식 600만, 비공식 2,500만명이 거주한다. 국경 넘어 중앙아에는 50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중국의 200년 지배 동안 42번의 반란을 일으키며 수백만명이 희생됐음에도 위구르족은 ‘위구르스탄’이란 장래의 국명까지 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중국 경제성장과 9ㆍ11이 뜻밖의 억제효과를 내고 있다.
미국은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알카에다와 연결된 테러로 규정했고, 중국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해줬다.
여기에 중국경제의 성장은 위구르족에게 저항보다 돈을 선택하도록 했다. 중앙아와 중국에 친인척을 둔 이들은 다른 종족에 비해 유리한 무역조건을 이용, 부를 쌓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위구르족이 중국과 중앙아의 긴장을 줄이는 완충재란 평가가 나온다.
에너지 블랙홀인 중국에게 중앙아는 상품시장으로서보다 에너지 등 원자재 공급지로서의 위상이 더 커져 있다. 카자흐의 원유매장량은 세계 7위, 우라늄 크롬은 세계 2위, 망간 금 은 구리 아연 철 석탄 등은 세계 10위권이다. 이 덕에 카자흐는 경제가 급성장하는 브릭스(BRICKS:BRICs+카자흐+남아공)국가로 자리했다.
중국은 ‘중앙아의 사우디아라비아’인 카자흐에 국가수반이 잇따라 방문하며 공을 들이고 있다. 카자흐의 석유회사 페트로카자흐스탄을 42억달러에 사들여 세계를 놀라게 한 이후에도 자원 사냥을 계속, 악토베 아티라우 등 유전도시가 중국인들로 북적일 정도다.
작년에는 러시아와 유럽으로 향하던 카자흐의 송유관이 중국으로도 뚫렸고, 다른 파이프라인도 건설 중이다.
중국은 미국의 견제로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에너지 공급이 차단될 경우 중앙아를 대비책으로 여기고 있다. 카자흐도 러시아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중국카드를 활용하는 모습이다.
5월 알마티에서 열린 아ㆍ태 비즈니스포럼에서 중국측 인사는 양국관계를 “카자흐는 중국이 원하는 모든 것을, 중국은 카자흐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정리했다.
이태규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