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오르다 굳어버린 꿈들이 있다. 제주의 초록 평원 위에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봉긋 솟은 꿈 덩어리들. 한라산의 새끼들인 작은 화산, 오름이다. 제주 설화에 따르면 키가 큰 설문대할망이 삽으로 흙을 떠 일곱번을 던졌더니 한라산이 되었고 이 할머니가 신고 다니던 나막신에서 떨어진 흙덩이들이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수 만년 전 한라산의 후화산 활동으로 분출된 크고 작은 화산인 제주 오름은 모두 368개. 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오름들은 저마다 제주민의 역사를 품고있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 자락에 기대어 살아왔고 죽으면 오름에 산담(무덤 주위를 두른 돌담)을 치고 뼈를 묻었다. 제주의 속살, 오름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는 터전이었다. 신을 모시는 제단이었다.
▲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
새벽 파란 어둠 속 차로 달려간 곳은 북제주군 구좌읍의 다랑쉬오름(382.4m). ‘오름의 여왕’이란 칭호에 걸맞는 아름다운 오름이다. 일출에 맞춰 오름에 오르려 했지만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었고 자욱한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다랑쉬오름 안내판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인 굼부리(분화구의 제주말)까지 직선으로 뻗어오른 오름길. 만만치 않은 경사다. 나무계단이 끝나고 미끄러운 길 위로 고무발판이 설치돼 있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허벅지 근육은 죄어오는데 굼부리에서 안개가 마치 문 열린 냉장고에서 흘러 나오는 냉기처럼 쏟아져 내린다. 습한 한기에 피부가 차갑게 긴장한다. 길가 듬성듬성 피어난 철쭉이 초록뿐인 오름 사면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등 뒤엔 다랑쉬를 꼭 빼닮은 아끈다랑쉬오름이 분화구를 드러내고 있다. ‘아끈’은 ‘버금’이란 뜻. 발아래 펼쳐진 아끈다랑쉬의 초록 분화구는 예쁜 쿠션 모양이다. 그 위로 안개까지 살랑거리니 지금이라도 막 동화속의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쉬엄쉬엄 20여 분 오르니 드디어 정상이다. 굼부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안개는 더욱 짙어 사위는 희뿌옇기만 했다. 굼부리 가장자리를 따라 1.5km 되는 둘레를 한바퀴 돌았다. 다랑쉬는 ‘오름 전망대’다. 아끈다랑쉬를 비롯해 용눈이오름, 동거문이오름, 아부오름, 돛오름, 높은오름 등 주변의 오름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새벽 안개가 깔린 제주의 평원, 오름들은 모습을 드러냈다 말았다 안개와 숨바꼭질이다. 안개 속 오름은 해무(海霧) 위에 뜬 섬이 되고, 유연하게 헤엄치는 고래의 등이 된다. 안개는 오름의 부드러운 곡선을 훑고, 오름은 안개를 들썩이며 서로 희롱이다.
왼쪽으로 용눈이오름을 내려보고 절반쯤 돌았을 때 저 멀리 구름 위로 비행접시 같은 산자락이 둥실 떠있다. 뭍 오름들을 너른 가슴으로 품고 있는 오름의 어머니 한라산이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굼부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니 불현듯 안개가 사라지고 초록의 제주 평원이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안개를 뿜어 올리던 굼부리의 깊은 속도 환해졌다. 분화구의 깊이는 115m. 비록 오름에 불과하지만 이 분화구의 규모는 한라산의 백록담과 거의 비슷하다. 시뻘건 마그마, 거친 불길을 내뿜었을 화구는 언제 그랬느냐는듯 진초록 생명의 빛으로 가득하다.
동쪽 하늘 구름 사이로 붉은 빛이 번질 때, 아끈다랑쉬 너머 멀리 일출봉이 바다 위 낮게 깔린 안개위로 뭉툭한 몸통을 곧추 세웠고, 우도는 길게 해무 위를 유영하고 있다.
비규칙적인 초록의 도형으로 가득한 제주의 평원은 한없이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풍경이다. 이리 휘고 저리 휜 밭들의 경계와 봉긋 솟은 오름의 곡선은 마음 속에 거칠게 자리잡은 각(角)들을 부숴뜨린다.
▲아끈다랑쉬와 용눈이 오름
다랑쉬에서 아끈다랑쉬오름을 내려다봤다면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높지 않은 높이(198m)로 다랑쉬에서 내려가는 탄력을 이용하면 단박에 올라갈 수 있다. 아끈다랑쉬 굼부리의 둘레는 600m. 굼부리 안 푸른 잔디밭은 소풍나온 아이들이 뛰어다녔으면 딱 어울릴 공간이다.
다랑쉬와 이웃한 용눈이오름도 오름 트레킹에 제격인 곳이다. 제주의 풍경만을 전문적으로 담아오다 2005년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진가 김영갑씨가 제주에서 가장 선이 아름다운 오름으로 꼽은 곳이다. 남북으로 비스듬히 누운 모습이 용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세 개의 봉우리와 세 개의 분화구를 가지고 있다. 다랑쉬와 달리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따로 조성돼 있지 않다. 풀밭 위에 먼저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발자국들만이 오름 정상으로 안내하고 있다. 오름 사면은 잔디 언덕. 지난 봄 꽃향유 지천이던 이곳엔 요즘 민들레가 가득 덮었다. 초록 위를 거니는 발끝마다 노란 민들레 꽃물이 든다.
힘들이지 않고 10분이면 정상에 오른다. 누운 용의 모습을 한 등성이는 맘껏 몸을 굴리고 싶을만큼 푹신하면서 포근한 초록의 품속이다.
▲다랑쉬, 용눈이오름 가는 길
1112번 도로와 16번 도로가 만나는 구좌읍 송당4거리에서 16번 도로를 따라 수산리 방면으로 4.4km 가면 종달리 방향으로 가는 48번 군도가 이어지는 하도3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좌회전해 10m 꺾어 들어가면 왼쪽으로 시멘트 포장 농로가 있다. 이 길을 따라 1.9km 가면 다랑쉬오름 안내석이 보이고, 옆에 주차장이 조성돼 있다. 이곳에서 나무계단과 고무발판으로 된 등산로를 통해 30분쯤 오르면 다랑쉬 굼부리이다.
하도3거리에서 계속 16번 도로를 타고 300~400m 수산리 방향으로 가다 만나는 길가 왼쪽에 길게 누운 능선이 용눈이오름이다. 접도구역 표지판 옆으로 철조망을 넘어 오름을 오르는 길이 나 있다.
제주도=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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