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화가-모네> 전을 보고 와서 나른한 행복을 느끼며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 를 다시 읽었다. 스무살 무렵에 바슐라르가 쓴 <수련, 또는 여름 새벽의 놀라움> 을 읽고 난 뒤 파리에 가서 모네의 수련을 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드디어 파리에 가게 되었을 때 무슨 약속을 지키려는 듯이 오랑주리미술관을 찾아갔으나 공사 중이었다. 수련,> 꿈꿀> 빛의>
수련 한 폭이 아니라 한 방에 가득 둥글게 수련이 연작으로 전시되어 있어 그곳은 마치 수련의 방 같았다는 동행자의 꿈꾸는 듯한 설명을 공사 중으로 문이 닫힌 오랑주리 앞에서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수련이 서울시립미술관에 왔다.
가능하면 바슐라르가 표현한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가고 싶었지만 이른 오후에 갔다.
모네의 수련은 화폭 안에서 ‘밤새 젊어’ 져 ‘온통 신선한 꽃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 ‘여름 밤의 편안한 잠을 자고 나서 물과 태양의 순결한 처녀로서 빛과 함께’ 수면 위에 어린 수련을 이 서울의 한 복판에서 마주 대한 황홀한 이 순간이라니.
그러다가 색채의 뭉개짐을 보았다. 수련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뭉개짐이 손이 베이는 것 같은 전율과 함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황홀감에 빠져 있던 여운을 채 버리지 못한 채로 몇 발짝 물러섰다.
백내장 수술을 한 후의 모네가 그린 수련은 더 이상 물가에 어려 있는 진주방울 같은 수련이 아니다. 화가로서 시력의 쇠퇴는 치명적이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 선 인간의 광포와 고독이 그 뭉개진 선 안에 넘쳐 흘렀다.
가만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걸음걸이를 단정히 하고 입을 다물었다. 모네가 그토록 사랑한 지베르니 정원만이, 새벽마다 물방울을 머금고 피어나던 연못 속의 수련만이 그의 고뇌를 알았을 것이다.
수련만이 아니라 모네의 모든 그림은 가까이에서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좋다. 색채가 더욱 제색으로 뒤섞이며 꿈꾸는 공간을 이루어낸다. ‘수련은 여름꽃’이다. 수련이 지는 것은 ‘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하면 이 여름이 가기 전에 또 가능하면 사람이 많은 주말보다는 평일 오전 이른 시간에 수련을 보러 가기를. 물을 가르고 피어난 그 꽃송이 앞에서 되찾은 젊음을 느끼며, 영혼의 새벽을 맞이해보기를. 그리고 실명 앞에 선 모네의 슬픔과 고독까지 경험해 볼 수 있다면 수련을 찾아가는 여행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신경숙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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