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뽀뽀가족’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모두 저하고 뽀뽀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헤헤”
화창한 봄 날씨 만큼이나 상큼한 이영환(6ㆍ대전 대덕구) 군의 가족 소개에 다른 아이들의 엄마 아빠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지난달 26일 오후 대전 대덕구 덕암동 덕암유치원 3층 강당에서는 고려대 인간생활환경연구소가 주최한 ‘3대가족 한마당’ 행사가 열렸다. 여성가족부의 가족문화증진사업 공모에 선정된 연구소측이 개발 중인 프로그램의 일부를 시연하는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이 유치원과 맞은편 덕암어린이집의 4~7세 어린이들과 부모, 조부모 등 20가족. 유치원 이수화(42) 원장은 “부모와 함께 하는 행사는 종종 열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3대가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소개했다.
고려대 김경은 겸임교수의 사회로 시작된 첫 프로그램은 ‘가족이름짓기’. 어린이들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와 상의해서 저마다 특색 있는 이름을 만들었다. “우리는 ‘큰 공룡가족’입니다. 티라노사우루스를 좋아하거든요.” “우리 식구들은 모두가 일을 잘해서 ‘로봇태권V’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한 가족씩 나와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강당 안은 웃음과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이어진 프로그램은 ‘가족퀴즈 OX 한마당’. 모두가 일어나서 문제를 보고 맞으면 O, 틀리면 X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흔한 방식이지만 한가지 이채로운 점이 있었다. 문제가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 유아 세대 등으로 구분돼 3대가족이 모두 있어야만 풀 수 있도록 된 것이다.
강당의 대형 스크린에 만화영화의 한 캐릭터가 보여지고 ‘나는 핑구입니다’라는 글이 나타났다. 그 캐릭터를 잘 모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O,X 어느 쪽으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자 손자와 손녀들이 손을 잡고서 X 표지판 쪽으로 이끈다. “쟤는 핑구가 아니라 뽀로롱이에요. 할아버지는 그것도 몰라요?”
하지만 이어진 문제에서 금세 상황이 역전됐다. “제삿상 차림에서 ‘조율이시’란 대추, 밤, 감, 배의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다. 맞습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어린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매달리며 도움을 청했다.
“배와 감의 순서가 바뀌었잖아.” 할아버지 덕에 한 고비를 넘긴 아이들은 “우리 할아버지 최고!”를 외치며 폴짝 폴짝 뛴다.
이제 엄마, 아빠도 한 몫을 해야 할 차례인데, 아뿔사 다소 어려운 문제가 나왔다. ‘적립식펀드를 CMA라고 한다?’ 정답은 X였지만 많은 가족이 O를 선택했다.
탈락한 아이들은 엄마, 아빠에게 화풀이를 하고, 부모는 다소 스타일을 구겼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는 표정이다. “아빠가 경제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음엔 꼭 맞힐게. 이번 한 번만 봐 줘.” 이 한마디에 아이들의 표정은 금세 환해졌다.
“보세요. 조부모, 부모, 아동 등 어느 한 세대의 힘만으로는 문제를 다 맞힐 수 없었죠? 모두가 힘을 합하니까 너무 즐겁고, 좋은 성과도 거둘 수 있었죠?” 사회자는 프로그램 사이에 나서 세대간 화합의 중요성과 유용성을 강조했다.
다음 순서에서는 각 가족에게 신문과 잡지, 칼, 풀, 도화지가 주어졌다. 신문과 잡지에서 가족 구성원을 표현할 수 있는 글자와 사진 등을 오려서 붙이는 시간이었다.
김민현(6) 어린이는 ‘할아버지는 백화점’이란 글씨를 만들고 그 이유를 “사달라는 것을 다 사주신다”고 설명했다. 다른 한 어린이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글자로 ‘소주’를 선택해 강당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엄마의 많은 구두가 평소 부러웠는지 엄마하면 ‘구두’를 떠올린 어린이도 있었고, 청소를 깨끗이 잘 하시는 할머니를 ‘진공청소기’라고 표현한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가족은 꾸밈이 없었다.
이날 행사의 마무리 또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안대로 눈을 가린 채 무대에 나란히 앉은 이들 가운데서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를 찾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우왕좌왕하고 넘어지면서도 아이들은 정확히 자신의 가족을 찾아냈다.
“어떻게 찾았죠?”라는 사회자의 물음에 대한 어린이들의 대답은 “팔 만지고 알았어요” “냄새를 맡았어요” “손이 조금 보였어요” 등등 다양했다. 하지만 김준휘(6)군 등 가장 많은 어린이들의 대답은 “그냥 알았어요”였다. 눈 감아도 그냥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이란 것을 참가자 모두가 공감한 듯 보였다.
1시간 반 가량의 행사가 끝난 뒤 모두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손녀 예지(4)의 재롱?실컷 즐겼다는 서누가(59)씨는 “유익하고 좋은 행사였다.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며 흡족해 했다. 한 할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는 방법을 배워서 좋았다”고 말했다.
부모 가운데는 자신의 부모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고 고백하는 이가 많았다. “시부모님과 떨어져 살아 자주 못 만났는데 이번 기회로 부모님과 아이들이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자식 뿐만 아니라 부모님께 더 잘해드려야겠다고 느꼈습니다.”
3대가족 한마당은 어린이들만이 아니라 부모, 조부모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가족임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고려대 가정교육학과 정옥분 교수는 “과거에는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릎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젠 그런 전통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3대가족의 통합은 어린이의 사회정서 발달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대전=전성우기자 swchun@hk.co.kr
■ 손주랑 놀아주는 법 알면 가족애 더 돈독해져
명절 아니면 조부모와 부모, 자녀 등 3대가 얼굴 마주 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어쩌다 한 자리에 모였어도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컴퓨터게임 등에 빠져들고, 어른들도 안부 정도나 주고 받은 뒤 어색한 침묵 속에 멍하니 TV만 쳐다보기 일쑤다. 대화가 부족하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고 오해만 쌓이다 보니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고려대 인간생활환경연구소의 ‘3대 가족마당’ 프로젝트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족 내 세대간 단절을 극복하고 건강한 가족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다. 기초 연구를 거쳐 지난달 대전에서 3대 놀이체험에 초점을 맞춘 시연 행사를 가졌고, 7,8월에 고려대에서 서울 지역 30가족을 대상으로 8주간의 본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8주간의 프로그램 중 첫 5주에는 가족 3대 가운데 부모 세대가 참여, 현재 자신의 가족관계의 장점과 문제점을 찾아보고 세대간 소통에 가장 중요한 바람직한 대화법을 익힌다.
박연정 연구원은 “3대의 중간 세대인 부모들이 변해야 그들의 부모, 자녀와의 관계 개선, 나아가 가족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6,7주에는 3대가 모두 참여하는 놀이마당과 서로의 장점을 찾아 격려해주는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 마지막 8주에는 건강한 가족관계를 위해 함께 실천해야 할 것들을 계획하고 다짐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연구소는 이렇게 해서 완성한 프로그램과 시행 효과 등을 학회에서 발표한 뒤 각 가정이나 단체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보급할 예정이다. 8주 프로그램 참여 문의 (02)3290-2679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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