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90년대 들어 정치인으로 변신, 개혁 진영의 대표적 대선주자 반열까지 올라섰다. 하지만 2002년과 2007년 대선에서 모두 대중적 지지 확보라는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하고 연달아 분루를 삼켜야 했다.
65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 3학년 때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제적된다. 이후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되면서 재야 활동가로 부상했다.
2차례에 걸친 5년 6개월 간의 투옥과 장기 수배ㆍ도피생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고문 사실 폭로 등 그의 20, 30대는 험난한 민주화 과정 그 자체였다.
그는 80년대 이후 민청련과 전민련 등 재야 민주화 단체를 이끌면서 중견 민주화 활동가로 각광받았다. 현실 정치 참여를 미루던 그는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면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15대 총선부터 서울 도봉갑 지역구에서 내리 세 차례 당선됐고 2000년 8월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되면서 당 지도부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김 전 의장은 2002년 3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초반 최하위로 처지자 경선 포기를 선언했다. 당내 재야그룹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그는 노무현 대통령, 열린우리당과 운명을 함께 했다. 우리당 초대 원내대표와 당 의장을 지냈고 2004년 7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2005년 이후 잇따른 재ㆍ보선 패배와 지난해 5ㆍ31지방선거 참패로 우리당 인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6월 당의장이 돼 구원투수 역할을 맡았지만 우리당은 분열로 치달았고, 그의 지지율 역시 1% 대에서 치고 올라가지 못했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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