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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한국보훈대상/ 영예의 수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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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한국보훈대상/ 영예의 수상자들

입력
2007.06.13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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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이군경 부문 '최숙경씨'

시각장애 유공자의 빛이 되어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최숙경(崔叔卿ㆍ78)씨는 일제 강점기 일본 히로시마(廣島)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진로를 모색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 자진 입대했다. “나라를 구해내는 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겠다”는 일념으로 육군에 입대한 최씨는 전후방을 오가며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안타깝게도 53년 강원 양구 지구 전투에서 적의 포탄을 두 눈에 맞고 시력을 잃었다. 부상 때문에 상병으로 명예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설 곳이 없다는 생각에 한동안 충격과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다잡은 그는 61년 최정희씨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2남3녀를 낳아 기르며 장애에도 불구 남부럽지 않은 가장으로 우뚝 섰다. 75년에는 국가보훈처와 마산시, 지역부대의 협조를 얻어 경남 마산시 회성동 하천부지에 784평으로 택지를 조성하고 주택 건축을 시작했다. 33세대의 시각장애 유공자 가족들이 모여 살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사업이었다.

최씨는 77년에는 공동주택 내에 공부방을 설치하고 외부 봉사원들의 도움을 얻어 상이 유공자 자녀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경제적 자립만이 살길” 이라고 생각해 돼지 사육을 결심한 최씨는 보훈연금을 재원으로 가축막사를 짓고 돼지 5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곧 20마리, 100마리로 늘어난 돼지는 자녀 양육에 큰 보탬이 됐다.

최씨는 2003년부터 대한민군상이군경회 경남지부 광명촌 특별지회장을 맡고 있다. 광명촌은 국경일마다 태극기 많이 달기 운동을 벌여 주민들이 ‘태극촌’이라고 부른다.

■ 미망인 부문 '황수연씨'

33년간 적십자 활동 1만시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황수연(黃守連ㆍ74)씨는 1951년 18세에 함양경찰서 순경 이용암씨와 결혼했다. 2남 2녀를 낳고 단란했던 황씨 가정은 62년 4월 경남 울산군 능촌면 율리 밤튀고개에서 무장간첩 수색 작전 중 간첩의 총탄에 맞아 남편이 순직하면서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황씨는 보따리 행상과 잡화상, 삯바느질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한푼 두푼 모아 조그만 가게를 열어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 남부럽지 않게 키워냈다.

65년 무연고 노인을 모신 데 이어, 74년 대한적십자사 봉사회원을 시작으로 사회봉사활동에 앞장섰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독거노인 목욕시키기, 불우세대 반찬 만들어 주기, 절미(節米)ㆍ저축ㆍ퇴비증산 운동 등을 전개했고, 가족계획 계도와 방역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또 바르게살기운동 함양군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평소 이 운동의 정신인 진실, 질서, 화합의 이념을 실천했다. 함양경찰서 주민신고 지도위원 등 다수의 봉사활동 단체에서도 일했다. 88년 서울올림픽 때에는 자원봉사자로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에 일조했다.

33년 동안 적십자 회원으로 수해와 태풍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생활필수품 전달, 빨래, 식사 제공 등 현장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적십자사 봉사활동이 1만 시간을 앞두고 있다. 대한민국 전몰군경 미망인회 함양군 지회장을 맡아 불우회원돕기, 고령자 방문 위로 등 회원 복리 증진에도 앞장서고 있다. 원호처장 표창(80년)을 시작으로 3차례의 함양군수 표창, 국가사회발전 유공자로 국무총리 표창(93년)을 받았다.

■ 중상이자 처 부문 '윤향자씨'

상이용사 자활 돕기 반평생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보행불능의 1급 척추장애를 입고 하사관으로 제대한 오영배씨 곁에는 언제나 부인 윤향자(尹香子ㆍ54)씨가 있다. 오씨가 탁구 선수로 세계척수장애인 체육대회에 3차례나 출전해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 대통령 훈ㆍ표창을 받고 서울 강동구 상일동 신생용사촌의 회장을 맡아 상이용사 자활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도 윤씨의 사랑과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윤씨는 1972년 오씨와 결혼한 직후부터 중상이용사촌인 신생용사촌의 기틀을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74년 용사촌이 정식 설립된 후에도 회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애썼다. 보훈대상 37가구 170여 명은 몸은 불편하지만 탁구, 양궁 등을 즐기고 서로 도와가며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오씨 부부는 주변의 어려운 보훈 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매년 명절과 연말이면 위문품을 마련해 독거노인이나 복지시설을 방문한다. 지금까지 모두 1,500만원 이상의 위문금을 전달했으며 지역의 불우이웃에게 매달 15만원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윤씨는 자신보다 힘들게 살거나 거동이 불편한 회원을 찾아 다니며 말동무를 해주거나 집안일을 거들어 준다. 가족에게 쓸 국가보조금마저 쪼개서 위로금을 전할 때도 많다.

서울로 이사오기 전 살았던 충남 부여에서는 남편을 내조하고 주위 사람을 성심껏 돌본 공적을 인정 받아 군청에서 주는 ‘장한 아내상’을, 73년에는 국가보훈처장 표창을 받았다. 남에게 베푸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험한 일 궂은 일을 도맡아 용사촌 회원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유족·유자녀 부문 '김홍식씨'

유족회 쉼터 마련 등 '봉사의 삶' 실천

충남 금산이 고향인 김홍식(金弘植ㆍ58)씨는 태어난 이듬해인 1950년 10월 금산경찰서 의용경찰대원이던 아버지를 인민군 총탄에 잃었다.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대전과 서울 등 객지에서 돈벌이에 나서야 했지만, 결혼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누구보다 땀 흘려 일했고, 인삼농사로 안정적인 생활기반을 마련한 건실한 가장이다.

93년 부친의 국가유공자증을 받은 뒤로 전몰군경 유족 돕기 활동에 눈떴다. 2002년 대한민국 전몰군경유족회 금산군 지회장이 되면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 어린 나이로 부모를 잃은 유족회 회원을 찾아 위로하는 등 회원들의 소외감 해소에 노력했다.

해마다 70여 명의 회원들과 봄, 가을 전적지를 순례하며 자긍심을 높이고, 금산을지병원과 자매결연, 회원들의 건강도 챙기고 있다. 2003년에는 금산읍 아인리에 지회 사무실을 자비로 열어 유족 회원들의 쉼터 및 정보교류의 장으로 제공했다.

2003년 지역 보훈상으로 받은 상금 전액으로 쌀을 구입해 무의탁 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에 나눠주었으며, 독거노인을 찾아가 말벗이 되거나 그들을 초청해 위안 잔치도 열고 있다.

2000년에는 금산의 남산 충령사가 무너지려 하자 군에 건의해 개ㆍ보수 공사를 이끌어내 현충일에 많은 유족들이 모여 분향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에는 군에 보훈가족 가정마다 문패를 달아주도록 요청해 국가유공자 및 유족의 집 339가구에 문패를 달 수 있게 만들었다. 국가보훈처장 표창을 두 차례 받았고, 금산군수 표창(2002년), 충남지사 상패(2003년)를 수상했다.

■특별보훈 부문 '박정일씨'

중·러 일대 독립운동 사적지 발굴 앞장

독립유공자 박중진 선생의 아들 정일(正一ㆍ69)씨는 1990년대 초부터 민족정기 선양과 유공자 돕기 운동에 헌신해왔다. 92년 광복회 이사에 선임된 이후 해마다 독립유공자 증손자녀를 선발해 120명에게 1억5,000만원의 장학금을 주도록 제안해 성사시켰으며, 불우 광복회원 200여 명에게 매년 성금을 지급토록 하고 있다.

93년부터 중국지역 독립유공자 묘소 실태를 파악하고 유공자 자녀 50여명을 선발해 사적지를 순방하고 있다. 광복회 주관 순국선열 및 독립유공자 추모제와 기념식, 탄신기념일 행사 등도 250여 차례 치러냈다.

99년부터 광복회 총무부장을 맡아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 발굴ㆍ답사에도 힘썼다. 2000년에는 중국 청산리 항일대승지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했으며, 이듬해에는 연해주 우스리스크에 이상설 유허비(遺墟碑)와 크라스키노에 안중근 단지동맹(斷指同盟) 기념 표석을 세웠다.

2002년에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상단부에 재만주 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을 건립했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 초대공사 이범진 추모비를 세웠다. 99년부터는 일본 도쿄(東京)의 2ㆍ8선언 기념행사도 주도해 치러내고 있다.

98년 대의원 및 회장 선임을 둘러싸고 광복회가 파행 운영되자 ‘광복회 정상화 추진위원’으로 활동하며 회원들의 오해와 불신 해소에 적극 앞장 서 광복회 위상 회복에 기여했다.

2005년부터 광복회 대의원으로 광복회의 권익과 회원 복지 향상에 애쓰고 있다. 대통령 표창과 감사패, 국가보훈처장 감사패 등을 받았다.

■ 심사평

삼국지의 최후 승자인 조조는 병사들이 전사할 경우 후히 장사를 지내주고, 자식과 친지에게 전답을 하사하며, 관가에서 소를 내주어 농사를 짓게 하고, 학당을 지어 자식들의 교육을 시키는 등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국가위난 때 처자식을 버리고, 개인의 영달을 버리고, 목숨까지 버리며 오직 조국을 위해 신명을 바쳤던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 고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할 때 매년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사랑 정신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온 유가족과 상이용사를 발굴하여 ‘한국보훈대상’을 수여하는 것은 보훈가족들의 자긍심 고양은 물론, 온 국민들에게 보훈의 참뜻을 일깨우는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또다시 ‘한국보훈대상’ 심사를 맡았다는데 크나큰 보람을 느꼈으며, 수상자 선정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보훈대상 후보자 대부분이 의로운 삶과 혁혁한 공적을 쌓은 분들이라 가슴 찡한 감명을 받았다. 수상의 영광을 안으신 분들에게 경의와 축하를 드리며, 보훈문화 창달에 앞장서 온 한국일보사와 국가보훈처, KT&G에도 감사 드린다.

손병익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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