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나 프라하에 견주어 베오그라드는 아리따운 도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한 공간의 아리따움이 건축물이나 풍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자리에도 있는 것이라면, 내 기억 속의 베오그라드는 파리나 프라하보다 더 아리땁다.
이런 판단엔 틀림없이 내 편견이 작용하고 있을 게다. 그러나 이 편견은 편견에 맞선 편견, 곧 대항편견이다. 공정해지기 위한 편견 말이다.
1993년 3월, 베오그라드는 세계 여론의 적의가 집중되는 수도였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책임은 주로 세르비아 민족주의 쪽에 돌려졌고, 그래서 허울만 남은 유고연방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무장세력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피에 굶주린 도살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 낙인이 부당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 전향한 그들은 제 권력을 위해서였건 세르비아인 공동체의 집단 이익을 위해서였건 무자비한 살육을 직접 지휘하거나 거들고 있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겨냥한,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을 겨냥한 세르비아 민병대와 정규군의 ‘인종청소’ 작전은 서방 언론의 날조가 아니라 실제였다.
그러나 전시(戰時)의 잔혹행위가 어느 한 편에 의해서만 저질러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지적할 언어도단이다. ‘인종청소’의 유혹에는 크로아티아인들도, 그리고 그 정도는 덜할지언정 보스니아 무슬림도 굴복한 상태였다.
르네 지라르가 ‘모방적 경쟁’이라고 불렀던 욕망의 동역학이 가장 폭력적인 형태로 발칸을 휘저으면서, 민족주의는 전선의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흉측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인종청소’의 방아쇠를 처음 당긴 것이 과연 세르비아 쪽인지 크로아티아 쪽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그런데도 국제여론의 비난은 거의 세르비아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정교(正敎) 국가인 러시아와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세르비아를 슬그머니라도 감싸는 나라가 없었다. 전통적으로 세르비아와 외교적 유대가 튼튼했던 프랑스 정부조차 국제 여론의 압력에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반세르비아 진영에 우호적 중립을 취하고 있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힘을 합치고, 여기에 천수백년 숙적 무슬림까지 끼여든 이상한 통일전선이 구축돼, 정교를 이지메하고 있는 꼴이었다.
이방인에게 다가와 “두 유 해브 저먼 마크스?”(Do you have German Marks?)라고 소곤대는 암환전상들이 베오그라드 역에는 지천이었다. 역 구내에 환전소가 있긴 했으나, 그 곳엔 고객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암환전상한테서 돈을 바꾸면 환전소의 공식 환율에 따를 때보다 서너 배나 많은 디나르화(貨)를 손에 쥘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베오그라드에 머문 일주일 동안에만도 유고 디나르화는 끊임없이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강대국들이 주도한 금수조처로 세르비아 경제는 기우뚱거렸고, 디나르화는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의 독일 마르크화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나는 베오그라드에서 고액권 지폐를 뭉치로 들고 다녔다.
내가 머문 숙소는 스플렌디드 호텔이라는 으리으리한 이름을 달고 있었다. 발칸으로 날아오기 전 파리에서 동료 기자로부터 소개받은 곳이었다.
나무 침대가 좀 딱딱하기는 했으나, 아침 식대가 포함된 하루 숙박비가 35달러밖에 안 되었다. 베오그라드에 도착하기 전날 부다페스트에서 130달러짜리 호텔방에 울며 겨자 먹기로 묵은 터라, 스플렌디드 호텔에 머물 땐 세르비아 정부로부터 주거 수당이라도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세르비아 사람들의 ‘악명 높은’ 민족주의는 뜬소문이 아니었다. <하자르 사전> 의 작가로 한국에 알려진 밀로라드 파비치도, 세르비아작가동맹 사무처에서 일하는 스베틀라나 P.도, 탄유그통신 기자 알렉산드라 V.도 마치 자동인형처럼 내게 말했다. 세르비아야말로 발칸 역사의 주역이었고 비잔틴문화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하자르>
그러나 전시(戰時)에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을 자유로운 영혼이 얼마나 되랴. 게다가 이들의 민족주의는 크로아티아인이나 보스니아인을 겨냥하기보다 서방 강대국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유고 내전의 배후로 내게 지목한 세력은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바란 서방의 정치종교 권력이었다.
이들만이 아니라 내가 베오그라드에서 만난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동포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또 자그레브나 사라예보의 정치인들을 욕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강대국의 권력자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올발라 보였고 사려 깊어 보였다. 그랬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극심한 고립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묘한 것은, 베오그라드가 그런 긴장 속에서도 대단히 활기찬 도시였다는 점이다. 그 이틀 전까지 내가 머물렀던 자그레브가 평온 속에서도 침울한 느낌을 주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내가 밤 시간을 자주 보낸 스카다를리야 구역엔 새벽까지 문을 여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드물지 않았고, 그 곳들엔 늦은 시각까지 사람들이 북적댔다.
거리의 키오스크에는 전황을 알리는 신문들과 도색잡지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길거리의 사람들도 유쾌하고 친절했다. 전쟁 얘기가 나올 때 잠시 평정을 잃는 것을 빼놓으면, 베오그라드 시민들은 편안한 호스트였다.
게다가 이들에겐 기품과 정이 있었다. 내가 이 도시에서 어울린 세르비아인들은, 적어도 첫 번째 술자리에선, 더치페이도 거부했고 내가 한턱 쓰는 것도 마다했다. 나도 노자가 그리 넉넉한 나그네는 아니었으나, 나보다 형편이 나을 것 없었을 그들에게 몇 차례 술과 밥을 얻어먹었다. “여기는 동방이니까”, 라는 것이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알렉산드라가 내놓은 설명이었다. 내 쪽에서도 빚을 갚으려 애썼다.
그래서 매일 밤, 이 도시에서 사귀게 된 세르비아 친구들과 스카다르 거리의 카페를 전전하며 먹고 마셨다. 파리에서라면 혼자 마시는 데 들 돈으로 베오그라드에서는 서너 사람이 마실 수 있었다. 해외여행 중에 베오그라드에서처럼 먹고 마시는 데 주력한 기억이 달리 없다.
지금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 사람들의 수도일 뿐이지만, 20세기 대부분 기간 동안 발칸의 유고슬라브(남슬라브인) 모두의 수도였다.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흔히 ‘두 번째 유고슬라비아’(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존재했던 유고슬라비아왕국을 첫 번째 유고슬라비아로 치고 부르는 말이다)라 부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창건자 티토는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그가 태어날 때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해 있었다. 티토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웅적인 파르티잔 투쟁을 펼쳐 발칸을 독일 점령군 손에서 해방시킨 뒤 베오그라드에서 35년 동안 유고슬라비아 전체를 다스렸다. 그리고 베오그라드에 묻혔다. 그의 조국은 크로아티아인가? 오스트리아나 헝가리인가? 아니다. 그의 조국은 유고슬라비아다. 베오그라드는 유고슬라비아인 티토의 수도다.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보 안드리치는 보스니아에서 태어났지만 양친 모두 크로아티아인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 보스니아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했다. 안드리치는 제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게 될 <드리나강의 다리> 를 1940년대 전반기 독일 점령 하의 베오그라드에서 썼다. 전후에 그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정치지도자로 활동했으나, 은퇴한 뒤 베오그라드에서 죽었다. 드리나강의>
안드리치의 조국은 크로아티아인가? 보스니아인가? 오스트리아나 헝가리인가? 아니다. 그의 조국은 유고슬라비아다. <드리나강의 다리> 에서 시작해 <트라브니크 연대기> 와 <아가씨> 로 이어지는 그의 3부작 역사소설은 보스니아를 주된 배경으로 삼고 있긴 하지만, 그 소설들이 그리는 역사는 문화와 인종이 교섭하고 뒤섞이는 발칸 전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아가씨> 의 배경은 사라예보와 베오그라드 두 도시다.) 게다가 안드리치의 소설 문장은 크로아티아방언과 세르비아방언을 자유롭게 오갔다. 그러니 안드리치는 유고슬라비아인이었고, 베오그라드는 유고슬라비아인 안드리치의 수도다. 아가씨> 아가씨> 트라브니크> 드리나강의>
영화감독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가계는 세르비아 쪽이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다. 그에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째로 안긴 <언더그라운드> 는 배경이 베오그라드다. 쿠스투리차의 조국은 보스니아인가? 아니면 베르나르 앙리 레비를 비롯한 비판자들로부터 그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로 몰렸으니 그의 조국은 세르비아인가? 언더그라운드>
아니다. 쿠스투리차의 조국은 유고슬라비아다. 그의 영화들이 그려온 것은 특정한 민족의 삶이 아니라 집시들(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로마니’라고 부르자)까지를 포함한 유고슬라비아 사람들 전체의 삶이다. 쿠스투리차는 유고슬라비아인이고, 베오그라드는 유고슬라비아인 쿠스투리차의 수도다. 이제 그들의 조국은 역사 교과서 속으로 들어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겉보기에 베오그라드가 그리 아리땁지는 않은 도시라는 험담으로 나는 이 글을 시작했다. 그 말을 거둬들여야겠다. 베오그라드에 가게 되면, 칼레메그단 공원을 찾아 한나절을 보내 보라.
머물던 호텔에서 빠른 걸음으로 40분쯤 걸리는 그 공원을 나는 거의 매일 찾았던 것 같다. 옛 성채 자리이기도 한 칼레메그단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푸른빛으로 유럽의 어느 공원 못지않게 아리땁다. 베오그라드시의 수호자라는 포베드니크(‘승리자’라는 뜻이라 한다)상(像)과 이런저런 박물관들을 비롯해 볼 거리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칼레메그단 공원의 가장 큰 볼 거리는 그 공원에서 내려다보는 베오그라드시 자체다. 칼레메그단에선 사바강과 도나우강이 합류하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바 강 저쪽이 신시가지(노비베오그라드)고 이쪽이 구시가지다.
사바강이 도나우강에 흘러들듯, 욕망과 의지의 수많은 켜가 이 둘레 공간에 차곡차곡 쌓이며 발칸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 역사는 헝가리인들의 역사이기도 하고 터키인들의 역사이기도 하고 독일인들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세르비아인들의 역사고, 남슬라브인들의 역사다.
베오그라드는 ‘하얀 도시’라는 뜻이라 한다. “어디가 하얗다는 거지요?” 3월의 어느 오후, 칼레메그단에서 베오그라드를 눈에 담으며 내가 스베틀라나에게 물었다. “하양은 당신 마음속에 있지요.” 그녀가 지혜롭게 대답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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