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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악쓰지 말자

입력
2007.06.13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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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를 겸한 간단한 식사와 함께 막걸리나 소주, 고량주를 마셨다. 취기가 돌아 얼굴이 불그레해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외치듯, 신음하듯, 악쓰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목이 잠기도록 노래하고 마셔도 목마름은 가시지 않았다. 목과 코가 매캐하고, 눈은 아릿했다. 장단을 맞춘다고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릴 때마다 옷자락에서 조금씩 피어 오른 최루탄 가루나 뿌옇게 낀 담배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목마름이 반(反) 유신 투쟁과 광주항쟁을 불렀다. 할복과 투신, 분신으로 젊은 피가 뿌려지고, 그런 죽음의 외침이 대중을 움직였다. 거리마다 노래와 구호의 물결이 넘쳤고, 그 도도한 물결이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독재의 둑을 마침내 무너뜨렸다.

많이 바뀐 대학가 풍경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대학가의 술자리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먹고 마시고 떠드는 자리에서 노래가 사라졌다. 노래 생각이 나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무반주로 부를 만한 노래가 드물어졌고, 이어폰으로 MP3 노래를 듣는 모습이 상징하듯 노래가 개인 공간에 갇혔다.

더러 노래방에서 합창 소리도 들리지만, 늘 옆방과는 다른 노래다. 젊음의 열정이야 예나 지금이나 같겠지만, 젊음의 노래는 더 이상 목마름과 울분을 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 20년 전 함께 어깨를 걸었던 세대의 눈에는 걱정스럽게 비치기도 한다.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쏟아져 나온 담론 가운데도 그런 지적이 많았다. ‘박종철과 이한열도 모르는 대학생’, ‘TOEFLㆍ취직시험 학원이 되어가는 대학’, ‘예민한 사적 관심과 둔한 공적 관심’, ‘20대의 보수화 경향’ 등의 우려가 무성하다.

심지어 “민주화가 먼 옛일로 잊혀지지 않도록 체계적 국민교육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20년 전의 승리를 현장의 감동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럴 만하다. 스스로의 젊음을 민주화에 바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할 것이다. 모진 보릿고개를 넘어, 번듯하게 살게 된 사람들이 어려움이나 물건 귀한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배신감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는 심정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심정이야말로 기억 고정에서 비롯한 착각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목표나 지향점이 아니라 불가결한 삶의 조건이다. 물과 공기와 같아서 틀어 막히고 나서야 비로소 목이 타고, 숨이 마르는 고통을 통해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이들이 그런 고통을 거칠 일 없이, 마음껏 마시고 숨쉬도록 하자는 게 우리들의 꿈이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우려를 낳는 많은 현실이 다름 아닌 민주화의 성과물이다. 정치적 민주화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민주세력_수구세력’ 따위의 이분법이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게 됐다. 젊은이들이 제 앞가림에만 신경을 써도 될 만큼 세상 걱정도 줄었다. 개인의 발전을 위한 노력이 쌓여 사회를 빠르게 발전시키고 있다.

한국은 아직 ‘민주화 도상’

이런 노력이 경제적 가치에만 집중되고 있는 문제는 심각하지만, 이는 공과 사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가치의 다양성에 눈뜨지 못한, ‘민주화 도상(途上)’의 한 단면이다. 그만큼 지난 20년 간의 ‘압축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의 갈 길은 멀다.

폭발하듯 터져 나온 개인과 집단의 자기 주장을 안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절제가 가장 시급하다. 절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모든 주관적 가치가 얼마든지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인식의 정착을 위해 어쩌면 현재의 법과 제도의 틀 안에 답답할 정도로 개개인의 권리를 잠시 가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우리 모두 목소리를 낮추자. 목청을 높이면 더 큰 목소리가 돌아온다. 주먹을 내리치며 목청껏 부르던 노래 대신 이제부터 귀를 간질이는 발라드 풍의 노래에라도 젖어보자.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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