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우리의 자랑거리인가, 아니면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을 제약하는 공공의 적인가.
6월 항쟁 이후 20년, 최대의 수출 실적과 최악의 양극화 속에 온 국민은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재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일상 생활의 권력이 된 재벌, 그 재벌과의 가상인터뷰를 통해 경제민주화의 현실을 짚어봤다.
_20년 사이'슈퍼 재벌'되셨습니다. 4대 재벌의 매출액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34.1%에서 2005년 49.2%까지 높아졌다는 통계도 있던데요.
“열심히 일한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기여도가 커진 거죠. 글로벌 경쟁이 격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몸집을 키워야 밖에서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살아 남기 위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출자총액제한이다 뭐다 해서 규제만 잔뜩 늘어놓고 사소한 실수 몇 개만 부각시키고 있으니 정말 답답합니다. 제 경쟁력이 곧 한국 경제의 경쟁력 아닙니까.”
_대외 경쟁력 부분에는 이의를 달지 않겠습니다. 국내에서는 어떻습니까. 경제력 집중이 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 여러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죠. 일례로 재벌이 국내 고용에 기여하는 비율은 20%도 안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중소기업의 몫인데, 그나마 재벌 하청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경제가 처한 어두운 면을 인정한다고 칩시다. 예를 들면, 중소기업의 임금축소, 자영업자 몰락, 수출이 늘고 경제가 성장해도 고용이 늘지 않은 현상 등 말입니다.
그렇지만 왜 그런 것을 재벌이 해결해야 합니까. 재벌도 ‘이익을 추구하는 그냥 기업’입니다. 왜 우리가 복지도 책임져야 하고, 중소기업 임금도 책임져야 하고, 전국의 젊은이들의 일자리까지 책임져야 합니까?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돈을 내놓기는 하지만 정말 피곤합니다.”
_어폐가 있군요. 재벌들은 지난해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로 투자위축 등을 들지 않았습니까. 마치 출총제만 폐지하면 투자도 하고, 일자리도 창출하고 할 것처럼 정부를 압박했었죠.
“솔직히 말하면, 출총제 폐지할 테니 일자리 늘려달라고 우리에게 ‘딜’을 시도한 정치권이나 정부가 웃겼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우리야 출총제가 폐지되는 게 좋으니까, 응수했던 것이죠. 정치권은 그런 ‘립 서비스’를 좋아합니다.”
_출총제가 투자를 위축시킨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데, 재벌들이 말하는 투자라는 게 뭡니까. 다른 중소기업 인수합병(M&A)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걸 투자로 볼 수 있나요? 출총제가 막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 타 기업에 대한 출자 즉, 무작위적인 인수합병 아닙니까.
“인수합병이 왜 투자가 아닙니까? 능력 있고, 사업성 좋아보이는 기업들 골라서 저희가 투자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기업들도 우리가 투자한다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_결국 사업성 좋은 중소기업을 전부 흡수해서, 재벌 속으로 편입시키겠다는 뜻이군요.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시는데…. 당장 생각해보세요. 당신 부모님이 운영하는 회사가 자본이 없어서 어려운데, 거기에 우리가 투자를 해주겠다고 나서면 기쁘지 않겠습니까?”
_그럼,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죠.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배구조에 정답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중에 몇 개 그룹이 계열사간 순환출자로 꼬리를 물고 있는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지금 재벌 자산이 너무 늘었기 때문에 계열사들을 연결한 순환출자 구조가 없으면, 그룹을 진두지휘하는 총수가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_바로 그겁니다. 왜 지분이 쥐꼬리만한 오너가 그룹을 지배해야 합니까? 그게 소위 말하는 '자본주의'입니까?
“그럼 우리 재벌들이 외국자본에 넘어가길 바랍니까? KT&G를 보세요. 그 좋은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외국 자본의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_그렇다면 경영자가 능력과 주주의 뜻에 따라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한번 사장은 지분이 얼마나 줄어들더라도, 영원한 사장이어야 하나요? 만약 현재 오너가 훌륭한 경영자라고 판단하면, 주주가 주주총회에서 재신임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
_물론 1차적으로 정부가 능력이 없어서 그간 제대로 관리를 못한 책임도 클 겁니다. 재벌의 역할이 이제 정부보다 더 큰 것 같은 인상도 받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최근에 박람회다 올림픽 유치다 해서 세계를 누비며 열심히 표를 얻으러 다닌 사람이 누굽니까. 그뿐인가요. 복지사? 장학사업, 문화예술 지원, 언론사 스폰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게 많은데 지나치게 인정 받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_정부가 해야 할 일, 사회적 시스템이 해야 할 일을 재벌의 '적선'에 의존해야 할 정도가 돼버린 것 같아 오히려 씁쓸합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그건 정말로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기업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닌 한에는 ‘편법’으로라도 이익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왜 재벌이 사회적으로 가장 도덕적인 집단이 돼야 합니까.”
_안철수 박사의 말을 전하고 싶군요. '수 조 원씩 이익을 내는 대기업이, 납품 IT업체에는 원가와 인건비만 따져 돈을 준다. 대기업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려도, 중소 IT업체는 사람을 더 고용할 수도, 종업원에게 더 혜택을 줄 수도 없다.'
“…. 일단 이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도 그런 분위기를 감안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는 겁니다. 상생, 지배구조 투명화 등등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 재벌과 정치자금
지갑서 꺼내는 돈 점차 줄어 5·6共때 兆단위에서 지난 대선땐 수백억대로
민주화 이후 정치권력과 재벌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정치자금 문제다. 역대 정권은 재벌들에 끊임 없이 손을 벌렸고, 재벌은 '부분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었다. 지난 20년 간 더 공고해진 재벌구조의 이면에는 이런 검은 공생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1995년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난 결과에 따르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모두 7,000억원 가량의 금품을 받았다. 기업인들에게서 별도로 거둔 각종 성금과 기금을 합하면 9,500억원에 달한다.
뒤를 이은 노태우 전 대통령은 5년 동안 기업들로부터 5,000억원을 거둬들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한 의혹을 줄곧 부인했지만 대통령 후보 시절 민자당에 내놓은 돈이 3,000억원 정도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10월 대선에서 신한국당이 'DJ의 670억원 비자금'을 폭로하는 바람에 위기에 처했다.
가장 가까운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은 이른바 '차떼기' 등의 수법으로 기업들로부터 총 823억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받았고 노무현 캠프 역시 112억원 규모의 불법 대선자금이 드러났다.
눈에 띄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현격히 줄어든 돈의 규모다.
그런 면에서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2005년 4월 "5ㆍ6공 때는 대선자금이 조 단위였고, 문민정부(92년 대선), 국민의 정부(97년 대선)로 오면서 1,000억 단위로 줄었다가 지난 대선 때는 100억 단위로 줄었다"고 주장한 것은, '차떼기'가 엄청난 돈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데 대한 방어 논리로는 부족했지만, 사실 자체로는 적절한 지적이었다.
올 3월 초 5개 정당 대표들은 '투명한 대선을 위한 정당 협약'에 서명했다. 경제5단체 대표와 재벌 총수들도 '투명한 대선을 위한 시민 서약'에 서명했다.
전경련은 5년 전에도 대선을 앞두고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결의했고 95년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사건' 때도 비슷한 다짐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모두 다짐만으로 끝났다. 민주화 20년인 올해 치러지는 대선에선 이들의 다짐이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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