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이 드디어 속살을 열었다.
‘서부진 화부득(書不盡 畵不得)’이라. ‘글로써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써 얻을 수 없다’는 금강산 중에도, 육당 최남선이 “‘미(美)의 떼거리’가 부쩍부쩍 달려들어 어떻게 주체해야 옳을 지 모르겠다”고 했던 금강의 진미, 내금강이 열리는 것이다. 1일부터 일반인들의 관광이 시작된 내금강을 미리 다녀왔다.
금강산을 남북으로 잇는 오봉산(1,264m), 상등봉(1,229m), 옥녀봉(1423m), 비로봉(1,638m), 월출봉(1,580m), 차일봉(1,529m) 줄기를 경계로 서쪽 내륙을 내금강, 바다로 치내려간 동쪽을 외금강이라 부른다. 경사가 가파른 바다쪽과는 달리 내금강은 상대적으로 완만해 외금강은 굳센 남성미, 내금강은 온화한 여성미를 띤다고 한다.
예전 선인들이 금강산에 간다는 것은 내금강에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금강은 자연의 수려함도 빼어나지만 장연사 장안사 표훈사 정야사 마하연 보덕암 묘길상 등 많은 사찰과 유적을 품은 답사의 보고다.
분단 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철원서 금강산전철을 타고 내금강까지 들어갔다. 지금은 외금강 온정각에서 만물상을 거쳐 106굽이 온정령을 넘어서 돌아 들어간다. 아직 철원 평강을 지나는 금강산 길이 뚫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물상 입구 한하계 계곡에 들어섰을 때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온정령 고갯마루의 온정령터널을 지나자 다행히도 잦아들었고 시야가 뚫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금강군 지역. 비포장 흙길이지만 최근 보수했는지 버스는 부드럽게 내달렸다.
계곡을 따라 달리던 비포장 길은 단풍마을을 지나고 금강읍 시가지 한가운데를 지난다. 약국과 국수집 간판이 보이는 시가지는 마치 1960, 70년대 극을 위해 지어진 드라마 세트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철이령을 넘고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서 내금강의 아름다움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백천골 물길을 따라 난 찻길은 장안사 터를 지나 표훈사 주차장까지 이른다. 이곳이 걸어서 오르는 내금강 탐승의 시작점. 표훈사는 유점사 신계사 장안사를 포함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한국전쟁의 무자비한 폭격에서 살아남은 곳이다.
절문으로 삼은 능파루를 지나 반듯한 절마당에 오르면 세월의 더께를 기왓장에 잔뜩 뒤집어쓴 반야보전이 좌우로 명부전, 영산전을 날개로 달고 자리하고 있다. 청학봉 오선봉 돈도봉 천일대 등 기암 봉우리들이 사찰을 감싸고 있다.
절을 끼고 산길은 바위 두개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터널을 지났다. 만폭동으로 들어가는 금강문이다. 이 문을 지나니 만폭동 계곡물이 힘차게 휘돌며 우렁찬 소리를 내뿜기 시작한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나의 북한문화유산 답사기> (하)에서 ‘만폭동은 담(潭)이 아니면 폭포요, 폭포 아니면 담이다’고 했고, 그 물소리를 ‘높은 소리, 낮은 소리, 큰 소리, 작은 소리가 동시다발로 일어나 장쾌한 화음을 이루는 만폭동의 실내악’이라고 했다. 나의>
만폭동 계곡이 크게 열리는 곳에 잘 생긴 절벽 봉우리 금강대가 우뚝 솟아있다. 금강대 주변은 봉래 양사언이 새겨넣은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의 글씨외에도 수많은 글자들이 새겨진 바위글씨의 경연장이다. 만폭동의 주체할 수 없는 감흥을 제 이름 석자로 대신한 이들이 이토록 많다
만폭동 계곡은 흑룡담 비파담 벽파담 분설담 진주담 구담 선담 화룡담 등 8개의 큰 담을 이룬다. 이중 분설담의 오른쪽 비죽 솟은 법기봉에 기둥 하나에 의지한 암자가 마치 제비집처럼 붙어있다.
700년 전 고려 때 세웠다는 보덕암이다. 이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만폭동 계곡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들어온다. 7.3m의 바지랑대 같은 나무기둥에 의지해 지은 누각은 아담하면서 화려하고, 주변 기암 연봉에 주눅들지 않으면서도 도드라지지 않는다. 금강의 수려한 자연과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만폭동 8담 중 마지막인 화룡담을 지나자 짙은 초록의 숲이 나타났다. 이 고요한 숲길을 벗어나 묘길상으로 가는 계곡의 이름은 화개동. 비로봉의 물을 받아 만폭동으로 흘려보내는 맑고 정한 물길이다. 벼랑에 난 잔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오르면 부처가 새겨진 거대한 바위 벽을 만난다. 고려시대 불상중 최고 명작이라 하고, 동방 최대의 마애불이라 하는 묘길상 마애불이다. 앉은 키의 높이가 15m에 달한다.
이곳까지가 허가된 내금강 코스. 이제 다시 거울같이 명징한 계곡인 화개동을 지나 만폭동의 수려한 계곡길을 따라 하산한다.
표훈사 앞 빈 터에서 점심을 먹고는 인근 백화암터 부도탑, 고려말 나옹대사의 전설이 어린 삼불암과 이제 달랑 부도 하나만 남은 ‘폐허 장안사’를 둘러보며 내금강과의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금강산 면세점 오픈
내금강 개방과 함께 금강산에 또 다른 관광상품이 탄생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금강산면세점이 5월 28일 온정각 동관 1층에 문을 열고 본격 면세품 판매를 시작했다.
255평 규모의 면세점은 화장품과 양주, 담배, 스포츠용품, 액세서리 등을 갖추고 있다. 면세점 한쪽에는 북한 술, 취나물, 고사리 등 북한 특산품도 함께 판매된다. 면세품 가격은 인천공항 면세점과 동일하다.
금강산 관광은 다른 여행처럼 일반 여행사를 이용하거나 현대아산이 운영하는 금강산 관광(www.mtkumgang.com)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예약하면 된다. 외금강호텔 숙박 기준 2박3일(주중) 요금이 39만원선. 내금강을 관광하려면 3만원이 추가된다. 현대아산 (02)3669-3000
금강산=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길에서 띄우는 편지/ 네번째 찾은 금강산
금강산을 찾은 건 이번이 네번째입니다.
첫 방문은 2004년 여름. 당시 집결지였던 고성의 금강산콘도에서 관광증을 받고 휴대폰을 맡겨두면서 긴장 속의 금강산 여행이 시작됐습니다. 이제 드디어 금지된 땅, 북한에 넘어가는구나 하고요. 금강산 관광은 평소에는 잊고 지내는 분단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체험여행이기도 합니다.
군사분계선을 넘고, 북한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는 것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금강산에서 본 교예단 공연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저런 묘기를 부릴 수 있나 놀라웠고, 그 재주를 익히려 얼마나 고생했을까 안쓰러웠습니다.
하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긴장감도, 세계적인 교예 공연의 감흥도 몇 차례 반복하니 시들해지더군요. 번호대로 줄 맞춰 수속하는 출입국 절차는 점점 귀찮아졌고, 같은 레퍼토리의 공연은 주말 오후 재방송 드라마처럼 지루해졌습니다.
내금강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북한측 해설사의 말에서도 ‘반복된 금강’의 피로감이 몰려왔습니다. “장군님”, “위대하신 수령님”, “임진조국전쟁(임진왜란)”, “인류 문명의 도살자 미제”….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하던 단어들이 차츰 익숙해지는 것 같더니 이젠 귀에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왜 그들은 하고싶은 말을 다하는데, 돈 주고 관광 온 우리는 하고싶은 말을 참아야 하는지 짜증이 들기도 하더군요.
금강산이 개방된지 10년이 다 돼갑니다. 그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금강산은 점차 많은 걸 열어주었고 많이 편해졌습니다. 호텔은 물론 해수욕장에 스키장, 골프장이 들어섰고 단란주점 포장마차 등이 생겨나 심심치 않게 밤을 즐길 수도 있지요. 한국 돈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해졌습니다.
문득 통일로 가는 길 가장 힘든 고비는 북한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북한 피로감’을 이겨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북 교류가 점차 증가하면서 통일에 대한 회의도 함께 커진다고 들었습니다. 교류 증대의 후유증일 겁니다.
남과 북은 반세기 이상을 격리돼 살았고 수년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지금도 총부리를 맞대고 사는 사이입니다. 현 상황에서 이정도의 수고는 감내할 만한 일인데도 사람의 욕심이란 게 그렇지 않나 봅니다.
내금강이 열렸으니 이제 비로봉 정상이나 통천의 총석정에 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그러다 보면 언젠가 남북은 하나가 되겠지요. 이번 금강산에서 느꼈던 ‘대북 피로감’이 쉽게 괜한 투정이었길 바랍니다.
금강산=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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