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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박차고 희망 향해… 달려라 정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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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박차고 희망 향해… 달려라 정원아

입력
2007.05.3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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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m 11초24, 200m 22초92. 국내 남중부 육상 단거리의 2, 3위에 해당하는 좋은 성적이다. 그런데도 정작 기록의 주인공은 못내 아쉬웠는지 “다치지만 않았다면 1위도 문제 없었을 텐데…”라며 고개부터 떨군다. 얼마 전 전국대회에서 여유 있게 눌렀던 경기도 선수가 1위를 해 서운함이 더했다.

한국 육상의 기대주 이정원(15ㆍ경북 영주시 소수중 3년ㆍ사진)군. 그가 27일 김천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전에서 세운 이 기록은 육상 입문 불과 2년 만에 거둔 수확이다. 사실 이군은 이번 대회 출전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일주일 전 다른 선수들과 합동 훈련을 하면서 왼쪽 허벅다리를 다쳤기 때문이다.

주변에선 다들 말렸지만 이군은 진통제를 맞아가며 출전을 강행했다. 은메달은 감각이 사라진 다리로 죽을 힘을 다해 뛴 훈장과도 같다. “무리하게 연습량을 늘린 게 화근이었나 봐요. 예선전을 치르고 나니 통증이 너무 심해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내로라하는 선수들 가운데 제 위치를 꼭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자라온 환경과 훈련 여건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군의 성적은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 그가 다니는 소수중학교는 유림의 본산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인근에 자리잡은 시골 학교다. 영주 시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고 전교생도 43명에 불과하다. 당연히 육상부는커녕 변변한 운동장조차 없다.

이군은 할머니(76)와 단 둘이 산다. 어머니는 어릴 때 집을 나가 여태 소식이 없고, 일용직 노동자인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손을 꼽는다. 벌이라야 할머니가 남의 밭일을 해주며 받아오는 품삯과 정부 지원금이 전부다. 할머니가 이른 새벽 일을 나가면 밤 늦게까지 홀로 지내야 했다.

달리기는 말 수 하나 없고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던 외톨이를 세상 밖으로 불러냈다. 중학교 입학 후 큰 키(176㎝)를 눈 여겨 본 체육교사의 권유로 육상에 입문했지만, 중ㆍ장거리 시절에는 그저 그런 선수였다.

그의 숨겨진 재능이 빛을 본 건 2005년 말 현재 코치인 이종후(40) 교사를 만나면서부터. “정원이를 처음 본 순간 길게 빠진 다리와 유연성 등 단거리에 최적인 신체조건이 눈에 쏙 들어오더군요. 한국 육상의 대들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지요.” 그는 이군을 위해 영주여중에서 면 소재지인 소수중으로 전근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군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년간의 혹독한 조련은 ‘미운 오리 새끼’를 ‘화려한 백조’로 탈바꿈 시켰다. 그는 이 달 초 전국 규모로는 처음 출전한 ‘춘계 전국 중ㆍ고육상대회’ 100m, 200m에서 모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량 상승세도 가파르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단 한 차례도 기존 기록보다 뒤쳐진 적이 없다.

무엇이 가난한 시골 소년을 달리기의 마력에 빠지게 했을까. 이군은 “성취감”이라고 했다. “알아주는 이 하나 없어도 달리기는 남은 한 줌의 힘마저 소진케 하는 묘한 힘이 있어요. 선두에서 결승점을 끊는 희열을 한번 맛본 뒤로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어요.” 요즘엔 세상과 소통하는 법도 조금씩 익혀 나가고 있다. 동료들과 트랙에서 땀을 쏟으며 관계의 소중함이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알게 됐단다.

그래도 생활은 아직 곤궁하기만 하다. 매일 한 시간을 훌쩍 넘는 시내 훈련장까지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야 하고 먹는 것도 풍족치 않다. 다행히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도 생겨 최근엔 KTF 후원으로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가 선정한 ‘청소년 희망나눔 기금’의 수혜 대상자로 뽑혔다.

이군의 바람은 소박하지만 분명하다. “실업팀에 빨리 입단해 무릎이 아프신 할머니를 편히 모시고 싶어요. 또 기회가 된다면 2011년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꼭 출전하고 싶습니다.” 꿈을 향한 이군의 도전과 질주는 계속된다.

영주=글ㆍ사진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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