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가리고 가슴은 내놓은 여자들, 국운이 기우는 마당에 장기놀이에 몰두하는 남자들, 생업에 바쁜 어머니의 무관심으로 위험한 환경에 방치된 아이들…. 사진에 담긴 구한말 조선의 모습이다. 이렇게 편향되고 부정적인 풍경이 담긴 사진이 서양인들 사이에서 유통되면서 조선은 문명의 계몽이 필요한 미개 사회의 이미지로 굳어져갔다.
29일 명지대 인문캠퍼스에서 열린 ‘근대전기 한국에 대한 서양인의 이미지자료 연구’ 발표회는 1860~1910년 생산된 사진ㆍ삽화 등을 분석, 당대에 서양이 조선을 어떻게 인식했나를 살펴보는 자리였다. 행사를 주최한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은 2005년부터 소장 자료, 국내 출판물, 해외 자료 등 총 9,400건의 이미지를 수집, 현재 정리 작업을 진행 중이다.
발표를 맡은 박평종 연구원은 “19세기 후반 서양인들의 방문이 시작되면서 이들에게 이국의 풍물과 문화를 소개할 엽서 사진이 본격 제작됐다”고 지적했다. 이런 사진은 개항 이후인 1880년대부터 한국 영업을 시작한 일본인 사진관에서 생산됐다.
장옷 입은 여인, 서당 풍경, 다듬이질 하는 모습 등 특정한 생활상이 연출됐고, 이렇게 정형화한 ‘사진관 사진’이 조선의 실상을 알리는 자료로 유통되면서 고착된 이미지를 낳았다고 박 연구원은 분석했다.
박현순 연구원은 서양인들이 직접 제작한 사진ㆍ삽화나 관련 진술을 분석, 한국을 보는 특정한 관점들을 살폈다. 그들은 담배와 담뱃대를 한국 남성의 필수품으로 파악했다.
흰 옷 착용은 여성을 빨래라는 중노동에 속박시키는 원인으로, 제사는 고인으로부터 보복 당할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두려움의 행위로 이해했다. 얼굴을 가린 중상류층 여성과 가슴을 드러낸 하층 여성의 공존은 일찍부터 서양인들의 관심을 끌어 관련 사진이 많이 소개됐다고 박 연구원은 설명했다.
러일전쟁(1904~5) 당시 자료를 살핀 강명숙 연구원은 “조선인들이 무능하고 국운에 무관심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운궁이 불타는 사진 밑엔 일본군과 영국군이 화재 진압과 질서 유지에 힘쓰고 있다는 설명이 달려 있어 조선을 의존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한다. 일본군의 평양 입성을 구경하는 군중이나 일본군 매점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을 담은 이미지는 조선인들이 국가적 위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서양의 편견을 투영한다.
한편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사진의 예를 제시했다. 당시 제작된 서양 자료집에는 강화도 지역을 찍은 사진을 ‘서울, 조선의 수도’로 소개하거나 엉뚱한 인물을 ‘한국 황제’로 잘못 지칭하는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 이 소장은 후대 연구자의 잘못으로 사진이 엉뚱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도 지적했다.
흔히 독립협회 모임 장면으로 인용되는 독립관 군중사진(사진 1)은 일진회의 친일 강연회를 찍은 것이고,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가하는 장면으로 알려진 덕수궁 돈덕전 앞 사진(사진2)은 단순히 테라우치 일본 육군대신 방한 기념으로 촬영된 것이란 설명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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