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 문이당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그의 등에서 나왔는데도"
소설가 이효석이 1942년 5월 25일, 35세로 요절했다. 그의 <메밀꽃 필 무렵> (1936)은 한국 단편소설의 가장 높은 자리, 우리말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아득한 정점에 올라 있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꽃>
이순원(50)의 단편소설 <말을 찾아서> (1996)는 이효석과 <메밀꽃…> 에 대한 헌사이자, 1990년대 한국소설의 백미의 하나다. 이순원은 또 이 소설로 이효석이 <메밀꽃…> 에서 여운으로 남긴 부자(父子) 관계(허생원과 동이)의 비밀을 새롭게 풀어보인다. 메밀꽃…> 메밀꽃…> 말을>
자식이 없자 어린 조카를 양자 들여 맏상주 삼으려는 마부(馬夫) 당숙, 몇 년을 “나는 노새집 양재 안 가” 버티는 소년. 조카의 고집에 실망한 당숙이 집을 떠나 산판을 떠돌자, 중1이 돼 당숙을 아부제(아버지이자 아제)로 모시기로 작정한 소년은 그를 찾아 봉평으로 간다.
둘이 노새를 끌고 <메밀꽃…> 의 허생원과 동이가 갔던 그 길로 돌아오는 것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니가 날 데리러 여게까지 완?” “야, 아부제.” “니가… 니가… 나를 애비라고 데리러 완?” “야, 아부제.” 메밀꽃…>
다시 읽어도 콧등이 찡해온다. 아부제가 끌던 새끼도 못낳는 말, 노새의 이름은 은별이였다. 나중에 장성한 조카가 보기에 아부제는 곧 은별이였다. 은별이의 생애는 아부제의 생애였으며,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그의 등에서” 나온 이 땅 모든 아버지들의 생애였던 것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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