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 열기가 무르익을 때가 됐는데도 대체로 조용하다. 한나라당 2대 주자의 각축이 일견 뜨거운 듯하지만, 이렇다 할 범여권 예비주자가 떠오르지 못한 상태여서 구멍 난 풀무에서 바람이 새듯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경선규칙 다툼으로 한나라당이 시끄러웠고, 앞으로 후보검증 공방도 벌어지겠지만 어차피 찻잔 속의 태풍이다. 늦봄의 나른함과 겹쳐져 선거가 영 시들하게 느껴질 정도다.
● 유권자 주문 잘 들어야
그 때문인지 아직 예비주자들의 혼이 서린 공약을 들을 수 없다. 그나마 한나라당에서 연 몇%의 경제성장률이나 몇 만 달러의 소득, 세계 몇 위의 경제대국 실현 등의 공약이 나와 있는데, 지금도 이런 공약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이라면 너무 순진하다.
수치목표가 국민의 관심을 끈 기억은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이라는 유신개헌 당시의 구호뿐이다. 단순한 수치목표가 아니라 그런 목표가 달성될 때 국민 각 계층의 생활에 찾아올 서로 다른 변화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시대다.
대선이 그리 멀지 않은 시점 치고는 대단히 이상한 현상이지만, 결과적으로 다행스럽기도 하다. 대결구도가 분명하게 짜여지지 않은 만큼 앞으로 선거 판이 모양을 갖추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정국의 요동과 유권자들의 혼란이 뻔하게 예상되고, 최대한 많은 국민의 의사를 공통분모로 삼아 공약을 다듬는 것이 설익은 공약이 남발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공약을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유권자들이 거꾸로 예비주자들에게 다양한 주문을 하고, 거기서 최대공약수를 간추리는 것이 좋은 공약을 만드는 방안이 될 수도 있다. 미리 여론의 검증을 거친 주문들이어서 주자들은 논리적 정합성만 갖추도록 정리하는 것만으로 공약 만들기를 끝낼 수 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에서는 딱히 끌리는 '선수'가 없다. 지난 세 차례의 대선에서 당선자를 모두 맞혔고, 미리 내심으로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갈피를 잡기 어렵다. 어차피 마음에 짚이는 후보가 없을 바에야,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 온 일을 약속해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무조건 찍을 작정이다.
그 첫째가 정부조직법 개정을 통한 대대적 정부기구 축소ㆍ폐지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조직이 국정홍보처다. 애초에 국정 현안을 널리 알려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국제사회에 국가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기본기능이지만, 결국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과 다르지 않은 정권 홍보기구로 전락했다. 자체 방송과 인테넷 매체까지 갖추느라 조직도 비대해졌다.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에는 저마다의 홍보조직이 갖춰져 있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충분히 자체적으로 정책 홍보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국정홍보처가 각 부처의 홍보기능을 통합 조정하도록 제도적 장치까지 마쳤다. 이런 옥상옥이 없고, 전파와 예산의 낭비가 없다.
● 국정홍보처 폐지하겠다
국내 정책 홍보는 청와대 홍보수석이 통합해 관리하고, 해외 홍보는 외교통상부에 맡기면 그만이다. 기자실 통폐합을 이끄는 등 국민의 시선도 어느 때보다 싸늘하다. '국정홍보처 폐지'만큼 작은 정부 실현 의지를 과시할 공약이 없다.
또 하나 꼭 듣고 싶은 공약이 있다. 말하자면 '저개발 공약'이다. 부동산 가격을 자극할 어떤 약속도 함부로 내놓지 않겠다는 공약이다. 한국 경제는 이미 국토개발에 경제 활성화의 성패를 걸 단계는 지나왔다.
현 정권의 '수도 이전' 구상에서 확인됐듯, 개발공약은 표를 모으는 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또 당장은 '땅값 오르고, 공사 늘어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새만금 사업 등에서 보듯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그러니 꼭 필요한 지역개발은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넘기겠다, 중앙정부는 지역개발 욕구를 되도록 억제하는 방향으로 국토의 균형을 살리겠다는 약속이야말로 진정한 개발 공약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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