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얼마 전 헬스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운동을 한 후 휴게실에서 사오십대의 부인들 몇 명이 김승연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듣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김승연씨가 잘못했다고 분개하는 게 아니라 김승연씨를 비난하는 여론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식이 얼굴을 십여 바늘 꿰맬 만큼 맞고 들어왔는데 어느 부모인들 가만히 있겠느냐. 주변에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가해자들을 두드려 패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먼저 김승연씨 아들을 때린 사람들은 놔두고 김승연씨만 욕을 하니 재벌이 무슨 죄냐”
헬스클럽 휴게실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들 기가 막힌 표정이 역력했다고 한다. 자식 가진 부모 마음에 김승연씨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거침없이 공개적으로 두둔하고 나선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잘못 가고 있다는 ‘빨간불 신호’다.
‘김승연 사건’에 대한 잘못된 개탄
며칠 전 그 얘기를 듣고 씁쓸했었는데, 오늘 신문에서 더 씁쓸한 기사를 읽었다. 김성호 법무장관이 이화여대에서 특강을 하면서 그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사건은 아들이 눈이 찢어져 들어온 것을 보고 아버지가 흥분했고, 혼자 힘으로 안돼 힘센 사람들을 데려가 되갚은 사건이다. 사실 부정(父情)은 기특하다. 정상참작 여지가 조금 있다…모든 언론이 이 사건 보도에 20일을 퍼붓고 있다. 1년에 몇십만 건 상해사건이 나오는데 2주 상해를 입힌 이번 사건은 왜 이리 오래가나. 집단 따돌림 아닌가…물론 그가 사회적 지도자급이기에 더 비난하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아닌가 싶다…법보다 주먹이 앞선다고 하는데 이제 주먹을 썼다가 구속됐으니 법이 주먹보다 세다는 것이 증명된 것 아닌가…”
내용을 보면 김 장관이 강연을 좀 재미있게 하려다가 말실수가 들어간 것 같다. 그러나 말실수 이전에 그의 인식이 문제다. 신문 방송이 이 사건을 요란하게 보도한 것은 누구를 왕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일부 선정적인 보도를 탓할 수는 있겠지만, ‘2주 상해’를 20일씩 퍼붓듯 보도했다는 시비는 농담으로도 옳지 않다.
김승연 사건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논할 수준도 못 된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부정(父情)이 아니라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자에 대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응징하겠다는 통제되지 않은 집념이다. 사회적으로 공인의 위치에 있는 재벌 총수가 가죽장갑을 끼고 직접 보복에 나섰던 통제불능의 복수심에 온 나라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임기도 없고 선거도 없는 ‘영원한 권력’으로, 점점 더 모든 권력 위에 군림하는 재벌이 그 막강한 힘을 법 밖에서 휘두른다면 어떤 세상이 되겠는가. 이번 사건에서 보듯이 경찰은 초기수사를 뭉개버렸고, 언론도 초기정보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부모의 심정’이라고 편들다니
이번 사건을 보며 부모의 심정 운운하는 것은 빗나간 것이다. 헬스 클럽의 그 부인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힘을 불법적으로 휘두르는 세상을 상상해 본 후에 누구를 두둔하고 누구를 비난할지 결정해야 한다.
법무부장관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이 국민에게 준 충격을 생각한다면 법무부장관의 입에서 “부정은 기특하다”느니 “이제 주먹을 썼다가 구속됐으니 법이 주먹보다 세다는 것이 증명된 것 아닌가”라는 식의 실없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이런 사태는 우리 사회의 양식이 마비되고, 사물을 보는 눈에 착시현상이 생겼음을 말해준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개탄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얄팍한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고 그 천박한 논리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이 와도 자신이 강자이면 괜찮은가. 마비된 양식을 되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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