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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적 자료 정리…'호적' 출간한 손병규 교수/ "가부장적 호적 체계는 근대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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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적 자료 정리…'호적' 출간한 손병규 교수/ "가부장적 호적 체계는 근대의 산물"

입력
2007.05.17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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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산하 대동문화연구원은 7년에 걸친 대규모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조선시대 경상도 단성현(현 경남 산청군 지역)의 1606~1923년 호적대장을 한글 및 한자로 전산자료화한 것이다.

규장각, 산청군, 일본 가쿠슈인(學習院)대학에서 수집한 호적대장 33권은 기록된 인물 수가 30만 명을 넘을 만큼 방대한 자료다.

전산화 작업팀의 일원이었던 손병규 성균관대 교수가 이렇게 정리된 호적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의 사회문화사적 면모를 탐구한 책 <호적> (휴머니스트)을 펴냈다. 그는 “호적이 당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기록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그 작성 원리를 파악하는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데이터 자체뿐만 아니라 데이터가 생산되는 원리까지 파악하면 조선의 사회상이 좀더 다채롭게 드러난다는 설명이다.

손 교수는 먼저 조선의 호적은 현재의 주민등록부에 가깝다고 규정한다. 오늘날과 달리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기준은 혈통이 아니라 해당 지역 거주 여부였다. 주민등록이라지만 모든 거주민이 호적에 기록된 것도 아니었다.

손 교수는 “도윤(都尹ㆍ호구조사 담당관)이 3년마다 호구와 토지 면적을 조사하면서 실제보다 적은 수치를 기록해 상부에 올렸다”고 지적한다. 18, 19세기에 걸쳐 단성현의 한 집 당 식구수가 늘 4.12명 수준인 것은 호적 조작의 대표적 증거. 호적을 기준으로 지방세를 부과하는 정부 정책에 맞서 지역 사회가 축소 보고를 통해 이익을 도모한 결과다.

조선시대 신분이 매우 유동적이란 것도 손 교수의 분석이다. 양반의 경우 내부에 반격(班格)이란 계층이 있어서 신분의 오르내림이 빈번했다는 것. 특히 어떤 가문의 딸과 혼인하는가가 신분 변동에 있어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반격이 높은 양반이 지위 하락을 감수하고 부유한 하층 집안 규수를 아내로 맞는 예가 호적에서 빈번히 나타난다”고 부연했다.

손 교수는 양반이 엄격하게 규정된 신분이 아닌 만큼 조선 후기 양반 증가 현상을 ‘신분제 해체’로 단순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19세기에 오면 양반에 해당하는 유학(幼學ㆍ과거준비생) 인구가 호적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그것은 관청에서 재정 확보를 위해 대량으로 신분을 팔았던 결과다. 손 교수는 “국가로부터 신분을 샀다고 해서 지역 사회에서 양반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라며 과대 평가를 경계했다.

또 손 교수는 통념과 달리 조선은 상층 계급이 하층을 일방적으로 수탈하는 경제 체제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일례로 단성현의 명문가 출신 권대유는 도윤을 맡았던 해에 자신의 노비 여럿을 호적에 올리고 이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대납했다. 손 교수는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경제적 부담을 스스로 지면서 체통을 세운 셈”이라며 “조선 사회에 도덕경제적 요소가 있었음을 방증하는 사례”라고 주장했다.

손 교수는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여성, 노비가 호주로 기재되는 사례가 많고, 남편과 더불어 아내 측의 가계(家系)도 함께 밝히고 있다”고 말한다. 흔히 전통적인 남녀 차별의 근거로 제시되는 현행 호적제나 족보 체계는 조선 후기부터 식민지 시대에 이르는 ‘근대 전환기’의 산물이란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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