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5월, 그들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생전에 목놓아 외치던 한줄기 빛, ‘민주주의’를 보았다. 광주 망월동 묘역에 새로 조성된 국립 5ㆍ18민주묘지로 유해가 옮겨지던 날, 그들은 3평짜리 영면의 땅을 얻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17일. 아침 일찍 이 곳의 아들 묘를 찾은 소복 차림의 주을석(72ㆍ여)씨 눈에는 마른 눈물이 돌았다. “큰아들 놈이 여기에 있는데, 매년 5월만 되면 무덤 속에서도 뭐라고 말을 해요. 그 날을 잊지 말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남들은 그게 안 들리는 모양이에요.” 고개를 떨군 채 돌아서는 그의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가 숨쉬는 5ㆍ18민주묘지의 풍경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서 묘비를 끌어안은 유족들의 몸이 흐느낌 속에 출렁거리고, 5월 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참배객들의 추모행렬도 여전했다.
그러나 역사의 기억에서 멀어지는 5ㆍ18을 되살려내야 한다는 바람만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글쎄 그게 잊고 싶다고 잊혀지는 게 아닙디다. 그런데도 세상은 자꾸 잊으려고 해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많은데…” 유족 박주원(58)씨의 넋두리는 5ㆍ18이 ‘역사’가 아닌 ‘과거’로 묻혀가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실제 최초 발포자와 행방불명자, 미국 책임론 등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5ㆍ18기념재단의 ‘5ㆍ18진실 조사사업’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사실상 중단됐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5ㆍ18 당시 발포 명령자 조사도 과거사위에 강제조사권이 없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다.
이 와중에 정부는 유족들에게 또 하나의 생채기를 안겨줬다. 교육부가 5ㆍ18 계기수업을 하고 있는 일선 초ㆍ중ㆍ고교에 ‘민중항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군부의)계획된 학살’ 등과 같은 근거 없는 사실을 언급해 불필요한 오해를 유발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다.
5월 단체와 교사들은 “5월의 저항정신을 기억하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며 반발하고 있다. 최근 문을 연 묘지 내 5ㆍ18추모관에서 만난 김봉석(39)씨는 “아직도 5ㆍ18을 우리 사회의 긴장 요인으로 여기는 교육 관료들의 천박한 역사인식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플 뿐”이라며 1층 전시실 입구의 안내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5월 정신 계승은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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