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의 여신은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정상을 향하던 두 한국 산악인의 투혼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영원히 아로새겨질 것이다.
고 오희준(37ㆍ골드윈코리아) 부대장과 이현조(35ㆍ골드윈코리아) 대원이 목숨을 잃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히말라야에서도 손꼽히는 난코스다. 정상까지 수직의 벽 높이만 2,500m에 달한다.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첫 도전때 추락사고를 당했던 박영석(44ㆍ골드윈코리아) 대장은 그 이후 반드시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단 루트를 뚫겠다고 다짐했다. 오 부대장도 “히말라야 14좌 완등보다 남서벽 도전에 더 큰 의미를 둔다”며 “히말라야에 코리안 루트를 내는 것은 필생의 꿈”이라고 강한 의지를 보여왔다.
박영석 원정대의 계획은 15일 전진베이스캠프(ABC)인 공격캠프 2(C2ㆍ해발 7,400m)에서 오 부대장과 이 대원 조가 C4(7,800m)로 출발, 16일 해발 8,300m에 C5를 구축하고는 다음날 1차 정상(8,848m) 공격에 나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박 대장을 뒷받침해 팀을 이끄는 최고의 베테랑들. 결국 정상 공격의 임무는 그들에게 맡겨졌다.
15일 밤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자정을 넘긴 이른 새벽 여기 저기서 크고 작은 눈사태 소리가 들려오자 오 부대장은 C2에 있는 박 대장을 무전으로 찾았다. 박 대장과 철수 여부 등 향후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서 였다. 눈사태가 오 부대장과 이 대원이 머물고 있던 텐트를 덮쳤다. 갑자기 교신이 끊긴 무전기에선 암연 같은 침묵만 전해졌다.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 기념으로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하려던 박영석 원정대의 도전은 처음부터 크고 작은 난관에 부딪혔다. 기상 불안으로 캐러밴 출발지인 루크라(해발 2,840m)까지 오는 비행기가 뜨지 못해 하루 늦게 도착했고, 베이스캠프까지 원정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예약해놓은 야크를 다른 원정대가 가로채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는 이재용(36) 대원이 갑자기 몸이 나빠져 결국 귀국해야 했고, 대원들은 셰르파들의 잦은 파업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남서벽 도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셰르파들은 돈도 싫으니 그냥 내려가겠다고 시위를 벌였고, 몇 명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철수해버렸다. 결국 박 대장이 “길은 우리가 앞에서 뚫을 테니 셰르파들은 밑에서 짐만 올려주면 된다”며 몇 번을 달래야 했다. 본격 정상공격에 나선 7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셰르파중 2명이 또 내려가, 원정대원 6명과 셰르파 4명만 남은 채 나머지 공격에 임했다.
남서벽 루트 개척에 성공했던 1975년의 영국 크리스 보닝턴대는 108명의 대원이, 82년 구소련대는 27명의 대원과 엄청난 물량공세가 성공의 밑거름이었다.
박영석 원정대 홈페이지에 남긴 원정대 일기는 “다른 원정대는 셰르파가 앞에서 길을 트고 짐까지 다 들어주는 반면, 우리는 대원이 직접 20~30kg의 짐을 지고 직벽에 로프를 치며 앞장서 나가야 한다”고 적고있다.
원정대가 이 모든 난관과 맞서면서도 험난한 남서벽을 올랐던 힘은 한국 산악인의 독기와 근성이었다. 대원들은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오르자”며 “ 남서벽 신루트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을 떠날 때 가슴에 맺힌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러나 대자연은 무심했다. 가늠할 수 없는 신의 의지 앞에서 대원들은 가슴에 동료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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