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진아 오빠”를 외치는 주책스런 할머니들 속에 낯익은 얼굴이 있다. “세상에… 우리 할머니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무엇보다도 우리 할머니는 이런 데 올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오른쪽 볼 입술 아래 팥알만한 점, 게다가 내가 선물한 양파 링 귀걸이. 너무 크고 색깔이 야하다며 손사래를 쳤던 바로 그 귀걸이라니….
아무리 도리질 해 봐도 우리 할머니가 맞다. 점잖게 스카프를 흔들며 쑥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은 채 노래까지 따라 부르고 있다. 동방신기 오빠들 보러 방송국까지 왔는데 기분 망쳤다. 이쯤 되면 ‘대략 난감’이다. 걸핏하면 ‘동작 그만’을 외치는 호랑이 할아버지에게 말대꾸하고, 수시로 외출하고, 운전 면허도 따고 변해도 너무 변했다.
옛날의 할머니가 그립다. 학교 갔다 와서 가방, 교복을 허물 벗듯 벗어 던지며 욕실로 가면 할머니는 나를 따라다니며 정리해 주곤 했는데.
‘태진아 팬클럽 회장님’에는 홀로 남아 외롭게 사는 할아버지, 재혼하려는 할머니, 치매에 걸려 깜빡 깜빡 하는 할머니 등 노인 문제를 다룬 짤막한 이야기 다섯 편이 묶여 있다. 아이들이 읽기에 재미있는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맞벌이 부모가 주로 할머니에게 육아를 의탁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조부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할머니도 날 때부터 할머니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처럼 소녀였을 때도 있었고,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걸 아이들이 헤아릴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녹여 냈다. 동화 작가 이용포씨가 입말을 맛깔스럽게 살린 덕에 술술 읽힌다.
‘우리 할머니 시집간대요’ 편은 사실 아이들보다는 부모가 더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처지가 비슷한 꽃집 할아버지를 만나 재혼을 결심한 할머니와 가족의 갈등과 화해가 생생하다. 꽃 좋아하는 할머니가 같은 취미를 가진 할아버지를 만나 소박하게 펼치는 황혼의 로맨스, 노망든 거 아니냐고 바락바락 대드는 고모와 마늘만 콩콩 빻는 할머니의 신경전 등 세세한 묘사가 탁월하다.
“늙기 싫어! 늙기 전에 죽을 거야!”라는 생각은 결국 불행한 노인들의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말이 맞다. 가수 콘서트를 따라다니고, 연애를 하고, 뒤늦게 춤에 재미를 붙여 콜라텍에 다니면 또 어떠리. 쓸쓸한 노년에 즐거움을 찾았으니 오히려 다행 아닌가. 이 책에서처럼 ‘이제 나하고 싶은 거 하며 살란다’라고 말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른척하지 말고 응원하자. 더 즐겁고 더 신나게 사시라고.
태진아 팬클럽 회장님 / 이용포 글ㆍ한지선 그림 / 푸른책들 발행ㆍ136쪽ㆍ8,500원
채지은 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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