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5,550m, ‘에베레스트 전망대’로 불리는 칼라파타르에 선다. 이곳에서 보이는 에베레스트(해발 8,848m)는 과연 ‘세계의 정상’답게 당당하다.
정면 깎아지른 듯 수직으로 서 눈이 내려앉지 못한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날 선 검처럼 검푸르다. 구름위로 치솟은 만년설 듬뿍 뒤집어쓴 히말라야 연봉들 사이에서 유난히 검고 그래서 더 강하고 도도한 산.
희박한 산소와 극한의 피로감에 쿵쾅대던 심장이 갑자기 숨을 탁 놓는 것 같다. 나지막이 속삭여 본다. 나마스테. 세계의 정상에게, 그리고 이곳까지 나를 이끈 생(生)에게.
카트만두를 출발한 16인승 경비행기가 20여 분 날았나. 유리창 밖으로 드디어 설산의 연봉들이 나타났다. 구름 위로 치솟은, 만년설 듬뿍 뒤집어 쓴 거산들. 몸에 전율이 인다.
프로펠러의 힘을 못이기는 낡은 동체의 진동이 아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고 오르는 환희의 울림이다. 히말라야의 감동은 손바닥 만한 비행기 창 너머로 처음 찾아와 영혼을 두드린다.
8,000m급 봉우리가 5,000km를 뻗어 이어지는 ‘지구의 등뼈’ 히말라야. 그 경이로운 산의 품속에 고요한 걸음새로 들어서는 구도의 길, 행복한 고행의 길이 히말라야 트레킹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의 대표적인 코스는 해발 2,840m의 루크라부터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를 잇는 길이다. 루크라는 경사가 급한 산비탈 지형에서도 경비행기가 이ㆍ착륙할 수 있도록 활주로를 경사지게 만든 비행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부터 베이스캠프(5,360m)까지 가는 교통수단은 오직 튼튼한 두 다리 뿐. 자동차 오토바이 등 둥그런 바퀴가 달린 탈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다잡으며 설산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긴다.
허름한 쿰부 셰르파 족의 집들을 지나고, 계단식 보리밭의 싱그러운 초록을 스치며 구불구불한 길은 조금씩 깊은 산 속으로 이어진다. 마을 어귀 마다 라마교 경전이 새겨진 마니스톤(경전이 새겨진 바위)과 손으로 돌릴 때마다 한발씩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원통형 마니차가 설치돼 있다.
어떤 대형 마니차는 흐르는 물을 이용해 물레방아식으로 설치돼 하루 종일 돌아간다. 마치 이 길을 지나는 모든 구도자에게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것처럼.
트레커들은 길에서 만나면 모두들 ‘나마스테’라고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네팔말로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등 많은 뜻을 가진 인사말이다. 히말라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마련한 주문처럼 그 말은 트레킹 내내 목덜미를 따뜻하게 감싸준다.
녹색의 낮은 봉우리에 가려있던 설산 연봉은 해발 3,400m인 남체를 지나면서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3,500m를 넘어서면 ‘고소증’의 공포가 엄습해온다. 숨은 벅차고 걸음은 저절로 더뎌진다.
하지만 걷는 길 고개를 떨굴 수 없는 것은 설산이 빚어내는 백색의 파노라마 때문이다. 지구의 3개 극지점 중 하나라고 하는 에베레스트가 눕체 로체 아마다블람 등과 함께 장쾌한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우뚝 서있다. 8,000m급 설산 연봉이 순정한 대기에 퍼뜨리는 광채에 넋을 잃는다.
일행 중 한 분이 “히말라야를 다녀간 사람들이 계속해서 히말라야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결코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저 빛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해발 4,400m, 사람이 농사를 짓는 마지막 마을인 딩보체와 페리체를 지난다. 이제 히말라야는 사람의 거주를 허락치 않는 신들의 공간이다.
트레커와 원정대를 위한 마지막 롯지(숙박촌) 고락셉(5,140m)을 지나면 길은 두 갈래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과 칼라파타르로 가는 길이다. 고소에서 오래 머물기 어려운 탓에 트레커가 양쪽을 모두 가보는 것은 어렵다. 등정에 관심있는 사람은 베이스캠프에, 에베레스트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싶은 사람은 칼라파타르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열흘 남짓 자발적이고 온전한 고립 속에 내면으로 침잠하는 산행의 끝, 이제 되돌아 내려가야 한다. ‘오체투지’의 심정으로 힘겨워하는 몸과 싸워가며 오른 히말라야. 시선은 설산 너머 검푸른 창공에 고정된다. 그 허허로운 공간을 향해 다소곳이 합장하고 인사를 한다.
“나마스테.”
히말라야(네팔)=글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사진 조영호기자 voldo@hk.co.kr
■ '히말라야 트레킹' 알고 떠나세요
히말라야로 가는 길에는 준비할 것도 많고, 고소병처럼 넘어야 할 장애물도 많다. 두 발로 장기간 산을 올라야 하니 어느 정도의 체력은 기본. 등산화 침낭 헤드랜턴 방한재킷 등 꼭 필요한 등산장비와 함께 고소의 두려움을 이겨낼 배짱과 인내심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시간. 일주일 안에 트레킹 일정까지 소화하는 여행상품도 있지만 ‘다이제스트’식 트레킹으론 대(大) 히말라야의 감동을 느꼈다고 할 수 없는 일. 2주도 빠듯한 시간이라 3주나 4주 정도를 확보해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또 시간이 여유로워야 고소 적응도 쉬워 큰 탈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트레커는 물과 카메라, 여분의 옷 등 가벼운 짐만 지고 오르면 된다. 큰 짐은 현지에서 고용한 포터에게 맡긴다. 하루 미화 10~15달러만 주면 고용할 수 있다.
트레킹 코스 곳곳에는 롯지(숙박촌)가 조성돼 있어 숙박이 가능하다. 난방이 되지않는 칸막이 방에서나마 찬바람을 피해 잠을 청할 수 있다. 아무리 허름한 롯지라도 식사 메뉴는 30여 가지를 갖추고 있다.
네팔 전통식인 ‘달밭’을 비롯 토스트에서 야크스테이크까지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유일하게 난방이 되는(야크의 변 말린 것을 연료로 하는 난로) 롯지의 다이닝룸은 전세계 트레커들이 함께 모이는 공간이다. 난롯불을 가운데 두고 트레커들은 식사를 나누고 서로의 경험을 나눈다.
네팔의 트레킹이 활성화한 지역은 크게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랑탕 등 3곳이다. 각 지역에서는 또 여러 갈래로 코스가 나뉘어지고, 트레커의 걷는 속도와 확보한 시간에 따라 자기만의 코스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세계 최고봉을 만난다’는 상징성으로 에베레스트 지역 트레킹은 일찍부터 인기를 얻었다. 루크라(해발 2,840m)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서는 칼라파타르(5550m)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5360m)를 보고 하산하는 게 보통의 일정이다.
루크라를 출발해 첫날 팍딩(2,610m)에서 자고 다음날 조금 무리해서 고도를 급상승해 남체(3,440m)까지 이른다. 천천히 가길 원하면 중간 조르살레(2,740m)에서 하루 머물면 된다. 해발 3,000m를 넘어서 남체에서는 고소 순응을 위해 이틀 정도 머무는 게 좋다.
셰르파족의 중심 마을인 쿰중에 다녀오든가 세계 최고 높이(3,900m)의 호텔인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 가서 커피 한잔을 즐겨도 좋다. 남체에서 탕보체(3,860m)까지는 거리가 길어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 중간 풍키텡카(3,250m)로 내려왔다가 바로 고도 600m를 치고 올라가야 해 천천히 마음을 비우고 올라야 고소병을 피할 수 있다.
탕보체를 출발해 디보체(3,710m)와 팡보체(3,930m)를 지나면서 히말라야의 황량함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일정으로는 페리체(4,270m)나 딩보체(4,410m)에서 이틀 밤을 보낸다. 해발 4,000m를 넘어섰으니 남체에서처럼 고소순응이 필요하다.
이후 두클라(4,620m)를 지나 로부제(4,910m)에서 하루 잔 뒤 마지막 롯지인 고락셉(5,140m)에서 머물며 칼라파타르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다녀온다. 올라가는 데 7~10일 걸리지만 내려오는 데는 3~5일이면 된다.
안나푸르나 지역도 트레킹의 명소다. 짧은 코스로 안나푸르나 최고 전망대라고 하는 푼힐(3,210m)을 지나는 ‘좀솜(Jomsom)루트’가 좋다. 9~10일 일정으로 최고 3,800m까지 오른다. 좀솜루트를 연장한 ‘안나푸르나 서킷 코스’는 16~18일 일정. 최고 5,410m까지 오른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코스는 10~14일 일정으로 최고 4,095m까지 오른다. 계곡이 아름다운 랑탕 트레킹 코스는 7,8일 걸리고 최고로 올라가는 높이는 3,870m다.
히말라야(네팔)=글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사진 조영호기자 voldo@hk.co.kr
■ 길에서 띄우는 편지/ 히말라야
카트만두 행 비행기에 오를 때만해도 에베레스트의 8,848m라는 높이는 그저 수치에 불과했습니다.
설산의 장엄 속에 숨죽이며 걷는 일 정도야 여행기자로 살면서 길에서 보낸 숱한 날들을 떠올리면 큰 무리는 없겠다는 오만도 있었지요. 그러나, 히말라야의 높이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온몸을 훑고 지나는 전율과도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트레킹의 시작점인 루크라(해발 2,840m)만 해도 백두산(2,744m) 정상보다 높습니다. 고소의 증세는 대관령을 차로 오르내릴 때 느끼는 귀의 먹먹함 정도가 아닙니다. 고소에서는 기압이 낮아지고 산소가 줄어들어 숨쉬기가 쉽지 않습니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았는데 마치 100m를 전력 질주한 듯 헉헉대며 숨을 들이쉴 때도 있습니다.
고소에서는 몸의 상태가 인큐베이터 속 아기처럼 면역력 등이 대폭 떨어진 상태라 모든 걸 조심해야 합니다. 고소병이 심해지면 폐에 급격히 물이 차 사망에 이를 수 있고, 뇌 속의 해마가 산소부족으로 파괴돼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 지기도 합니다.
고소병을 예방하기 위해선 몸을 빨리 움직이지 마라, 담배 피우지 마라, 술도 안된다, 물은 끊임없이 마셔라, 잘 때도 모자를 벗지 말고 체온을 유지하라 등 지켜야 할 수칙이 많습니다.
몸을 씻는 것도 최대한 자제해야 합니다.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하는 것은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합니다. 젖은 머리 때문에 체온을 빼앗길 경우 몸에 쇼크가 올 수 있습니다. 옷도 자주 갈아입지 못하고, 잘 씻지도 못하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다 보면 몸에 야크 냄새가 저절로 밴다고 합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10일에 걸쳐 오르고, 박영석 원정대 취재차 오랜 시간 베이스캠프에 체류하는 동안 제 꿈은 ‘어서 낮은 곳에 내려가 머리 한번 시원하게 감아봤으면’ 이었습니다. 털모자 속의 간지러움이 오죽했겠습니까.
마침내 하산길. 해발 4,000m 아래 첫 마을인 팡보체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샤워를 했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상쾌함의 강도가 그리 크지 않더군요. 한 움큼 빠져나간 머리카락처럼 왠지 허전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모처럼 말끔히 씻은 몸으로 밖에 나갔더니 이제껏 우리의 짐을 나르며 함께 했던 포터에게서 역한 체취가 느껴졌습니다. 처음 그들을 루크라에서 만났을 때 잠시 느꼈다가 이후 잊고 지냈던, 제 몸에도 깊게 배었을 그 냄새가 말입니다. 히말라야의 체취를 씻어내며 이제 드디어 히말라야에 작별을 고하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히말라야에 온 사람들은 고소병에 애를 먹다가도 막상 내려가면 설산을 못잊어하는 저소병에 시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제 몸에서 사라진 야크 냄새가 그리운 걸 보니 제게도 저소병이 시작됐나 봅니다.
히말라야(네팔)=이성원기자
■ 여행수첩/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 히말라야 연봉을 끼고 있는 네팔은 남으로 인도, 북으로 중국의 티베트와 접하고 있는 내륙 산악국가.
한반도의 3분의 2 크기인 국토는 동서로 길게 누워있는 형태다. 수도는 카트만두, 해발 1,350m에 있다.
인구는 2,200만명이고 90%가 힌두교도이다. 공용어는 네팔어를 사용하지만 관광지나 식당, 트레킹 길의 롯지 등에서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시차는 한국보다 3시간 15분 느리다.
통화는 루피. 최근 환율은 미화 1달러에 65루피 안팎이다. 달러를 들고 가 현지에서 환전해야 한다.
카트만두 트리부반국제공항에서 입국 비자를 받는다. 비자 발급비는 미화 30달러. 대한항공이 매주 토요일 주 1회 카트만두행 직항 비행기를 띄운다.
■ '히말라야' 설산처럼 하얗게 사노라네
히말라야의 뷰(View)는 높고 깊다. 산비탈에 난 길에서 내려다 보면 수백미터 아래에 빙하가 녹은 우윳빛 강물이 우렁차게 흘러가고, 고개를 들면 수천미터 거대한 설산이 눈 앞에서 하늘로 치솟아 있다. 히말라야는 자연의 웅장함 만으로 세속의 ‘오만’을 툴툴 털어낸다.
대자연 자체에서도 경외심을 갖기에 충분하지만 설산을 그 안에 녹이고 사는 히말라야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처음엔 ‘어찌 저렇게 가난할까’ 혀를 쯧쯧 차다가도, 돌이켜 스스로에게 ‘과연 나는 더 행복한가’를 자문하게 만드는 사람들. 가난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너그럽고, 외양은 초라해도 결코 비루하지 않은 삶. 순박한 얼굴을 떠나지 않는 미소는 히말라야 만년설의 광채를 닮았다.
히말라야 품속을 한발 한발 걸으며 만난 히말라야 사람들과, 그들이 신과 같은 존재로 경외하고 갈망과 헌신의 상징으로 여기는 히말라야 설산을 카메라에 담았다.
조영호 기자 vold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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